중편소설 - 대자연 ⑦
수인은 주인 없는 서재방에 서서 서울 그곳의 그날처럼 거대한 신문탑을 경외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그날 수인은 미진이 이혼 전후 일정기간 일기를 썼다는 사실 외 이 탑의 정체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게 되었는데, 그 후 한동안 미진과 격조하게 될 줄 만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날, 미진의 내면 깊숙이 침입한 기분으로 주춤거리며 서재방을 둘러보던 수인이 결국 저 신문지들은 무엇이냐고 물어본 것이 발단이었다. 때마침 배달온 작은 택배상자 하나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오던 미진이 별 것 아니라는 듯 다니고 있는 직장의 기관지라고 짧게 답했을 때부터 수인은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수인은 감정을 미처 가다듬지 못한 날카로운 음성으로 기관지? 라고 재차 물었다. 부엌 싱크대쪽으로 이동중인 미진은 어디 벼랑 끝에 서있는 것 마냥 쭈삣하게 날선 수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싱크대 하단 서랍장에서 가위를 꺼내며 어느 때와 다르지 않게 그러나 첫번째와 다르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창간호부터 마지막 회차까지 한 두 호 빠졌을까 거의 전량에 가깝게 모아온 것인데 현재는 인터넷판으로만 발행되고 있으며 옛날엔 이 신문을 꾸러미로 들고 전국을 돌며 조합원을 조직하러 다녔다고. 거기에 덧붙여, 환경운동의 한 축으로부터 출발해 정글같은 시장에서 살아남은 유일무이한 협동조합형 조직으로 성장하기까지 아들을 낳아 키운 시간 보다 더 긴 시간을 투신해온 조직이라 의미가 남다르다며 끝날 듯 연이어 한 말들은 거의 혼잣말 하듯 한 것이었다.
“근데 이제 슬슬 정리를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미진이 사뭇 처연해진 얼굴을 하고 상념에 젖어 말을 잇는 동안 수인은 어리둥절하면서 서운한 것 같기도 하다가 본격적으로는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원망의 감정에 휩싸여 퉁명스럽게 대꾸했지만 그 마음 도통 알리 없는 미진은 그저 씁쓸하게 웃으며 택배상자에서 꺼낸 마사지볼 하나를 발아래 두고 이리저리 굴려볼 뿐이었다. 미진이 감회에 젖어드는 사이 수인은 결국 속이 꼬여 붉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섰다. 그리곤, 어설피 핑계를 대며 그 집을 황급히 빠져나왔고 그 후로 한참을, 정확히는 41일간 미진과 연락을 끊고 지냈다.
온 몸에 신경이 돋아 솓구치듯 미진의 집을 빠져나온 수인은 그 후 이삼일 동안 가만히 있다가도 뭐에 부아가 났는지 뭐야 그 언니 하는 등의 혼잣말을 자주 내뱉었다. 어떻게 그렇게 깜쪽 같이 사람을 속여. 본 세월이 대체 얼만데. 수인이 홀로 내뱉은 문장들은 불쑥 튀어나온 말이라기엔 꼭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완결적인 문장구조를 띄었다. 아무 효용이 없는 감탄사와도 같은 말이었지만 그 시간동안 그나마 정리된 형태로 튀어나온 문장은 그뿐이었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정리가 덜 된 채로라도 후루룩 감정을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미진에겐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없었고, 더불어 그 시간 동안만은 온 신경세포를 집어삼키고 있던 수혁의 부재도 잊게 되었다. 그 뒤로 또 며칠은 갑작스럽게 하얀 적막이 찾아왔다. 그 때는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정화되었다기 보다 어딘가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일인용 소파에 앉아 자주 멍을 때렸다. 그리고 사건발생 일주일이 지나 드디어 수인은 자신이 왜 그토록 속이 뒤틀린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그날을 되짚어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당황스럽게도 시간의 보물창고 같던 서재방에서 함께 머물렀던 따뜻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급작스럽게 화면이 전환되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처럼 감정의 폭우가 쏟아져내리기 시작했고, 그 원인은 여전히 미스터리인 채 였다. 그러고보니 그날은 뭐 하나 새로울 것 하나 없이 지리멸렬한, 어느 날과 다름없는 그렇고 그런 저녁이었다. 당혹스럽게도. 수인은 미진에게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걸어 아무일 없었다는 듯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그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인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이주쯤 지나 요즘 경기도 안 좋다는데 일감은 좀 들어오느냐는 엄마의 잔소리인지 걱정인지를 듣다 엄마 그냥 당분간 아무 말도 하지마 하고 벌컥 화를 내며 참고 참다 하는 그 마지막 한소리까지 입막음하고서야 수인은 미진이 일하는 여성이라는 사실에 당황했고 옹졸해졌으며 볼썽사납도록 자책하다 돌연 그를 원오하고 말았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한다.
수인은 미진이 직장인일 것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와 매번 늦은 오후에 만나면서도 단 한번도 그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단정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미진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 혹은 그보다 곤란한 상황에 놓인 가장이었고 이혼녀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편해서였다. 몇 년 전 이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위자료를 좀 받았겠거니 했고 이혼 직후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서는 유산을 좀 받아 생활하는 것이겠거니 짐작했다. 조직, 투신 이란 낯선 말엔 거부감 마저 들고 있었는데 그보다 미진이 일하는 여성이라는 정보에 자신의 촉수가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걸 외면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그에게 조직된 조합원 중 하나였다는데 생각이 미쳤을 때는 그것이 배반감의 적당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그는 조합원 포섭을 목적으로 관계에 투신한 사람이었다. 원망스러웠고 충분히 미웠다. 수인은 미진이 자신과 유사한 동네 생협 매장의 이용객쯤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그날에서야 그가 생활협동조합의 직원 그것도 창립멤버에 준하는 직원, 더 정확히는 생협 본사의 주요 관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고 그와 동네친구가 된 계기와 관계해온 시간들, 그가 투신한 조직의 조합원되는 과정 등이 말끔하게 분리되기 어려워 못할 것바 없는 오해였다.
그러니까, 수인은 미진이 일하는 여성이라는 데 배반감이 들고 있었다. 그건 무의식의 배반감 같은 거였다. 어린 딸 둘을 들쳐업고 호기롭게 이혼을 감행한 젊은 엄마가 자존을 내어주고 얻은 대가로 따놓은 당상인줄 알았던 안전보장은 폭언과 억압의 상보관계란 제도적 역습의 그 무한 굴레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자연상태와도 같은 생존투쟁의 장에 투신했을 때 쟁취해야만 했던 그러나 끝내 미완성된 자립의 조건이란 삶의 목표를 갖거나 희망이나 꿈 따위를 품는 것이 아닌 소액이라도 따박따박 통장에 꽂히는 재미에 시름을 잃는다는 직장인이 되는 것 즉, 실물적 토대부터 갖추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젊음이 무기이자 약점이며 때론 최후의 거래수단이었던 엄마는 한철 특권과도 같은 신체적 변별성을 한사코 몸에서 지우고 각종 식당의 알바를 전전하다가 어느 프랜차이즈 도시락매장의 직원으로 정착하는 듯 하더니 무슨 사연인지 그곳을 그만 둔 이후 자영업으로 돌아서 잡화점과 보습학원을 거쳐 전, 분식, 칼국수 등으로 업종과 종목을 넘나들던 끝에 월수입 130만원 남짓되는 동네 작은 슈퍼마켓의 주인이 되었다. 배운 것, 가진 것, 남편복, 어쩌면 자식복에 거기다 융통성까지 없었던 엄마에게 주어진 응당한 이치였다. 그런 엄마에게도 배울 것이 있었으니 그녀의 삶에 끼어든 수인이 자연 터득한 것이란, 자기 하나 건사하기 힘든 절대적 존재에게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고역이자 짐이 되는 감각과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가족공동체의 해체를 막기 위해 오히려 이 관계로부터 탈주해야 하는 지상과제와도 같은 자립의 의무였다. 그건 수인의 응당한 도리였다. 수인은 어릴 때 100일 동안 쑥과 마늘이라도 먹어 사람이 되었다는 단군신화의 곰이야기에 한동안 심취하였는데, 100일간 마늘이라도 먹어 빠른 시일 안에 노동가능 인력이 되고 싶다는 진취적 목표의식과 함께 자신은 아직 동면중인 곰 같다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관이 형성된 때였다. 수인은 수혁과의 결혼으로 그 공동체를 탈주한 후에도 비자립된 존재의 무용론에 스스로 자주 직면하고 시달렸다. 도대체 자립의 감각은 언제쯤 생성되는 것일지, 풀지 못한 숙제 같이 매일 수인의 앞으로 청구서처럼 날아왔다. 커피값이라도 벌어보겠다고 시작한 설문조사형 앱테크 앱에서 자신의 고용상태를 물어올 때마다 매번 고민했고 무직이라는 단정적 상태가 아니라 상시노동가능 인력처럼 보이는 비상근직으로 체크하였으며 삼지선다형, 때때로 전업주부와 프리랜서 등이 포함된 선택지가 좀더 늘어난 객관식 문항에 이토록 자존을 갈아넣을 수 있는지 자문해보곤 했다.
수인이 드디어 그날의 이슈가 오직 자신만의 문제였다는 걸 홀연히 깨달았을 때 그는 홀로 지키고 있던 2인의 집 일인용 소파에 앉아 얼굴을 붉혔다. 속좁은 마음 자신에게 들킨 것 때문인지 미진에게 미안해서인지 아니면 둘다인지 알 수 없었지만 수인은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치고 싶었고 그럴 때마다 되려 몸은 꼿꼿하게 굳어졌다. 수인은 미진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하고 싶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순간에는 관계를 맺고 끊고 잇는 권한과 자격을 스스로 의심했다. 자주 몸이 굳어져 우두커니 서있을 때가 많았고 운신할 수 없을 만큼 외로워졌다.
정거장을 지나치거나 눈 앞에서 버스를 놓쳐도 당황하지 않았고 계산을 다 해놓고 장바구니를 통째로 놓고 나오기도 했다. 그 며칠은 고장난 인형처럼 수인은 자주 삐그덕거렸다. 별 계획없이 잔뜩 식재료를 사온 뒤 라면이나 인스턴트스프와 같은 것들로 끼니를 떼웠다. 그날도 인스턴트스프와 얼려둔 모닝빵 하나를 꺼내 홀로 저녁을 떼우고 싱크대 앞에 서서 새 것이나 다름 없이 깨끗한 식기를 씻고 있었다. 수인은 등 뒤 동그란 우드식탁에서 묵직하게 진동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 물티슈 하나를 뽑아 별 거 없는 식탁 위를 무심하게 닦고 있을 때 문자알림이 다시 한 번 진동했다.
- 자기 매장 나올 일 있음 계란 좀 사둬. 곧 품귀 올거야!
아무 일 없는 척 천연스런 투였다. 수인은 느리게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확인했고 반갑다기보다 뭉근히 밀려오는 안도감에 잔잔하게 전율했고 한편 응당 받아야할 징계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담담한 척 했다. 문자에 즉각적으로 답신을 하지 않는 대신 수인은 거실 책꽂이에 꽂아두고 애써 외면하고 있던 미진의 일기장을 매번 열어보는 유튜브 채널처럼 단번에 찾아 꺼내 펼쳤다. 드디어 미진이 어떤 각오가 선 것처럼 스스로에게 기합을 넣을 때쯤 그러니까 일기장의 도입부를 막 지나치고 있을 무렵 수인은 미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진의 문자가 있은 후 약 십오분쯤이 지난 뒤었다.
- 이번엔 계란인거야? 알겠어!!
삽입된 사진은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로, 대체로 특정 기간 한 지역에 머물며 오가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삽입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