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 대자연 ⑧
수인은 미진이 자신에게 내어준, 때때로 아들이 내려와 사용한다는 손님방 귀퉁이 자리에 트렁크를 조심히 밀어넣었다. 부엌 옆 1.5평 남짓의 소박한 방이었다. 검회색빛 어둠 속에 얇팍해보이는 줄무늬 차렵이불이 덮힌 일인용침대와 그 앞으로 그것을 세워둔 것처럼 우뚝 선 시커먼 수납장이 그 모두와 마주한 다른 벽면에 붙은 작은 테이블 그리고 그 안으로 반쯤 몸을 숨긴 의자와 함께 방안에 가득 그림자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실체 뒤 이어붙은 검은 형상들만 넣어놓아 그래서 꼭 빈방 같기도 했다.
미진이 무진으로 이사오며 쓰던 물건 중 가장 오래된 헌 가구들을 놓아둔 방이라며 누추하지만 옛 고향집 왔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있으라고 설명했을 때 수인이 고향집으로 떠올린 건, 엄마가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사이 조용한 목소리로 눈을 치켜뜨며 엄마 아빠 요즘도 맨날 치고받고 싸우냐고 물어오던 극성스런 고모와 자신과 언니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서슬퍼런 얼굴로 거실소파 혹은 자신의 방 보료에 반듯하게 앉아 계시던, 쪽진 머리 흐트러틀어짐 없던 친할머니가 있던 경기도 외곽 어두운 색 나무 장식이 거실 온 벽에 가득했던 단층주택의 친가였다. 부모의 이혼으로 초등학생 2학년 설 이후 방문한 적 없는 그곳을 수인은, 모든 것이 압도적으로 컸던 곳으로 상상했다. 수인의 상상 속에 그곳은, 육중하고 음산한 기운을 뿜어대는 커다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관리가 안 돼 잔디와 조경수가 구분되지 않은 너른 마당이 있고 어디를 밟고 지나가야할지 알 수 없는 길을 따라 걷다가 그들의 씩씩거리는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스러운데 여러칸을 2층으로 쌓아 만든 철제 케이지 안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냥개들이 쉴 새 없이 컹컹 짖어대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적대를 내뿜는, 대궐 같아 더욱 기괴했던 단독주택 같은 곳이 되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수인이 언니, 엄마와 대화를 나누다 친가에 대한 기억 아니 그보다는 상상에 가까운 그곳에 대해 언급했을 때 엄마는 너네 시가가 그렇게 큰 부자였으면 이렇게까지 너흴 모른 척 했겠느냐고 철 지난 이야기 하듯 말했고 한편 엄마에게 그 시간들이 다 지나가버린 옛 일이 되어버렸단 사실에 뜻하지 않게 안도하면서도 어쨌거나 그것은 수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참 벗어난 대화였다. 수인은 그 뒤로 일절 그곳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미진의 말을 듣다 떠올린 고향집이란 음울하고 괴기스런 상상과 이미지로 가득한, 현존하는지조차 더이상은 알기 어려운 친가였다니 하며 결국 자포자기하듯 자기연민에 빠져들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수인은 자신에게 할당된 낯선 공간의 문을 열고 서서 어둠 속에서 관조하듯 그러나 매우 열심히, 낡았지만 반듯하여 정겹게 느껴지는 장소의 무드를 피상적이나마 ‘고향집’이란 관념의 세계 안으로 옴팡 덧칠해놓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서서 낯선 공간을 둘러보던 수인은 침대 뒷 벽으로 시선을 멈춰세우고 다가가 몸을 숙여 헤드보드 위 공간에 세워진 둥근 버섯모양의 작은 스탠드조명을 들여다보다 그것의 머리주변을 더듬거리다 그것의 바닥에 붙어있던 스위치를 눌러 작은 방 안으로 빛을 들였다. 빛의 발원지 주변으로만 밝을 뿐이어서인지 스탠드 옆에 서있던 손바닥만하게 작은 액자가 빛과 그림자에 뒤엉켜 어지럽게 보였다. 사진에는 젊은 날에 미진이 지금의 수인처럼 몸을 숙이고 어린 아들을 뒤에서 안고 있었다. 아들의 얼굴은 웃는 것인지 삐쭉대는 것인지 알 수 없도록 굳어졌고 어깨는 안기는 것도 안기지 않는 것도 아닌 채로 솟아있다. 꽃다발과 금박이 박힌 남색 상장케이스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졸업식인 듯 보였다. 초등학교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는 가늠할 순 없었는데 그건 그의 아들을 보아서도 미진을 보아서도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외 헤드보드 위에는 알람용으로 보이는 오래된 둥근 시계와 눕혀놓여진 만화책 두권이 놓여있다. 기생수 4와 5편이었다. 몸을 일으켜 돌아봤을 때 테이블 위 누빔케이스를 입은 곽티슈와 로션 하나가 뒷벽에 길게 그림자 져 보였다.
수인은 옷을 갈아입으려다 말았다. 아직 손님인 테가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였다. 대신 수인은 바닥에 내려놓은 배낭에서 얇은 책 하나를 꺼내들었다. 미진의 일기장이었다. 일기장을 손에 쥐고 미진의 서울 집에서 허둥지둥 나온 뒤 꼭 그것이 그인 것처럼 장시간 방치하다 처음 열어본 이후부터 쭉 수인은 책상 서랍장 안 깊숙한 곳에 몰래 숨겨두고 먹는 고당류 간식거리 같기도 하고, 엄두가 나지 않는 숙제를 미뤄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하게 조금씩 아껴 읽었다. 미진의 일기장을 열어볼 때마다 묘한 쾌감과 동시에 죄책감이 들곤 했다. 수인이 이를 완독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는데 이 두가지 상반된 자극때문이었다. 일기장을 챙겨올지 말지 고민하다 결국 짐가방에 챙겨넣을 때는 돌려줄 마음이 절반 가량 있었고, 한편으로는 다 읽은 표를 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 여행의 이 일기장의 쓰임은 여전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 집에 와서는 미진이 없는 틈에 가장 격정적인 부분만 골라내 읽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고 있었다. 그것이 관음적으로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집에서 들던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다만 퍽 짖궂다는 생각을 했고 상대가 미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응석이라 여겼다.
방 안에서 나온 수인은 부엌의 조명 스위치를 켰고 그제야 부엌 둥근 식탁 위에 미진이 적어놓은 것과 같은 노란 포스트잇 한장이 눈에 들어와 보였다. 일기장의 그것보다 정성스러워 보이는 단정한 글씨체였다.
가스렌지 위 주전자에 돼지감자차를 끓어두었어. 변비에 좋다네.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끼니 챙겨. 난 금방 돌아올거야 - 미진
미진은 메밀, 우엉, 결명자, 옥수수수염, 둥글레, 작두콩, 구지뽕열매, 볶은무, 여주 등의 갖가지 말린 곡물과 열매들을 돌아가며 끓여 마셨다. 매일 마시는 물도 금새 물린다고 했다. 이번엔 돼지감자인 모양이었다. 자신의 고향인 이곳 무진에 두번째 지점 오픈 계획이 총회를 통해 공개되었을 때 미진은 불현듯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사업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지점관리 업무 배치를 사무국에 요청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 내려와서 매장 오픈 준비를 하며 다른 로컬푸드매장에서 식자재를 구입하고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 통화에서였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첫번째 생협 매장이 집에서 멀다는 이유였다. 산책 삼아 25분쯤 걸어 이용하는 로컬푸드매장은 곧 미진의 경쟁상대가 될 것이었다. 그러니 이 돼지감자는 미래의 경쟁업체에서 산 것이다. 이 지역에서 난 돼지감자겠거니 생각하고 가스렌지 화구 위에 올려진 주전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 수인의 기대와 달리 말린 돼지감자 찌꺼기가 보이지 않았다. 돼지감자를 실제로 본 적 없는 수인은 허기와 비슷한 섭섭함을 느꼈다. 끼니 챙겨먹으라는 미진의 메모를 보고서 드디어 배가 고픈 것 같았다. 수인은 미진의 구형 냉장고의 아랫칸 냉장실의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고, 그때 초인종 벨이 울렸다. 낯익은 듯 낯선 타인의 집에서 들으니 더욱 요란한, 꾀꼬리 울음소리와도 같은 벨소리였다. 주인없는 집에 공허하고 요란하게 울리는 벨소리가 기괴하게 들렸다. 미진은 이날 이곳에 없었다. 그는 아킬레스건 파열 진단을 받고 치료중이라는 아들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집을 비운 상태였다. 이날 점심 무렵 미진에게 연락을 받은 수인은 무진행을 미룰 생각이었다. 그저 여행겸 미진을 만나러 가는, 명분만 가득한, 당위를 찾기 어려운 여행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진은 전역을 앞두고 액땜이라도 하는 모양이라고 상대를 안심 시킨 뒤 군대에서 축구하다 다친 걸로 수선떨 것 없다며 이 김에 아들 얼굴도 보고 올라간 김에 본사에 들러 일 보고 내려갈테니 하루이틀 혼자 편히 지내고 있으라고 당부했고, 수인은 고민 끝에 일정대로 무진행을 택했다.
수인의 몸이 냉장실 문을 연 채로 가만히 멈춰섰다. 초인종이 울리기 전과 그 후로 수인의 의식은 180도쯤 변해있는 것 같았다. 택배배송완료를 알리는 알림일 거라고 스스로 속이면서도 어쩐지 바짝 날이 선 채였다. 들키지 말아야할 행동을 들킨 사람처럼 기분이 그랬다. 수인은 냉장고 문을 닫고 서서 문 밖의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귀를 기울이고 가만히 섰다. 그때 다시 한번 초인종 벨이 울리고, 이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는 문 밖의 사람이 안의 상황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했다.
“저 아랫집 사는 사람인데요”
삽입된 사진은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로, 대체로 특정 기간 한 지역에 머물며 오가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삽입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