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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May 30. 2023

무진의 운무

[일기] 간헐적 순천살이 (7)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 <무진기행> 중


순천에 내려와 처음 읽은 책은 김승옥 작가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이었다. 낭트정원이 있는 쪽의 순천만습지를 찾았다가 우연히 들른 순천문학관에서 무진기행이 이곳을 배경으로 쓰여졌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읽은 것이었다. 예전에 읽었을 땐 별 문제의식 없이 넘겨 읽었던 것들이 턱턱 걸리기도 하였으니 전반적으로는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진기행의 도입부는 왜 이것이 김승옥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지 알기에 충분했으며, 나는 이 구절을 여러번 찾아 읽기도 하였다. 위 구절은 책의 표지로 쓰이기도 했다. 주인공 '나'가 고향인 무진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반수면상태로 다른 승객들의 말을 엿듣다가 생각하는 구절이다. 나는 이 도입부로부터 일탈과 판타지로 직조된 다음의 장을 기대하게 되었는데, 잿빛의 안개가 머리를 짓누르는 것처럼 내려와 꼭 하늘과 땅이 맞닿은 기묘한 풍경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승옥 작가가 작품에서 묘사한 것처럼 "진주해온 적군", "이승에 한이 있어 찾아오는 여귀"와 같은, 이 안개에 대한 감상은 현재를 직시하는 운치 라기 보다 미래의 사건에 더 방점이 찍힌, 그러므로 그 다음의 장면을 예고하는 극적 장치 같이 느껴졌던 탓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가 기행이라는 여행에 대한 감상기 라기 보다 현실과 대비되는 의미의 여행기일 것이라고 예감했다.


그리고 나는 지난 두 번의 방문에서 몇 차례 흐린 날들을 만났지만 <무진기행>의 그 안개, 그 비스무레한 것도 마주보지 못했으므로 이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의 그것과 유사한 김승옥 작가가 만들어낸, 실제하지 않는 어떤 미장센 정도로 (안개가) 사용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실제 이곳의 명산물은 안개가 아니라 방앗잎이나 그 외 제철음식일 거라고 쾌활한 단정을 내렸다. 어쨌든 그것들이 내 오감을 사로잡았으므로.  


그러나 어제는 바다와 산이 접해 습지가 발달한 이곳의 운무가 다른 곳보다 조금 남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20도에서 23도의 온도, 시간당 20~50밀리미터의 강수량으로 오전 오후 비가 내리고 저녁부터 갠 후 이곳은 꼭 비 온 뒤 바다 한가운데 뱃머리 앞에 선 것처럼 온사방이 잿빛의 운무로 자욱했다. 비를 맞은 산이 꼭 바다처럼 내내 습기를 뿜고 우뚝 섰다. 끊임없이 수증기를 만들어 하늘로 올려보내었다. 하늘을 가득 매워 지배하는 땅의 기운 같은 것 같았다. 운무에 "유배당한" 산봉우리는 흐릿했지만 왜인지 그 본래의 크기보다 더 웅장하고 끝없이 솟아 이어질 것처럼 상상되었다. 베일에 가려진 그 먼 풍경들을 꿰뚫어볼 듯 올려다 보다가 김승옥 작가가 목도한 장면이 이것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무진의 운무가 이곳에 실제할지도 모르겠다는 감각. 어제 본 운무가 이날 순천에 복귀한 나의 다음 장을 예고하는 것처럼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듯 내내 휘감고 있다. 오늘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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