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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Feb 11. 2023

달과 해가 뜬 풍경 속을 달리며

[일기] 순천여행 

새해 첫 대보름이 뜬 날인 2월 5일 늦은 오후부터 저녁까지 오른쪽으로 해가 지고 왼쪽으로 둥근 대보름달이 뜨는 풍경의 한가운데를 약 4시간 가량 달려 당도한 곳은 전라남도 순천. 남편이 초등학교 고학년때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 살았던 두번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해남에서 태어나 순천과 광양, 여수 등에서 살아온 남편을 따라 강진과 광양, 여수 등으로 여행을 다녀봤지만 순천에서 지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편은 이번 여행을 감행하기 전 올해 하반기 진행될 프로젝트로 순천을 자주 오가게 될 것을 밝히며 반년쯤 순천에서 살아보기를 제안해왔다. 그건 프리랜서로 전향한 후 집순이로 모드전환 중인 나에게 꽤 관례에 어긋나는 제안이었고 그 이야기를 듣던 나의 표정이 떨떠름해보였는지 남편은 정성스럽게 순천에 지내게될 시간들을 설명했다. 순천만의 습지를 상상하게 하고 4월부터 열리는 정원박람회와 10월에는 남도영화제가 열릴 거라고 하며, 온동네가 축제의 도시로 활기가 띌 거리들을 상상하게 했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나의 원가족들을 초대해 가족여행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내가 좋아하는 광양불고기는 때때로 광양으로 넘어가서 먹고 오고, 겨울철엔 옆마을 벌교에 가서 꼬막정식을 먹자고. 도시재생지로 소규모 개발된 원도심에는 힙하고 이쁜 카페들이 들어섰다고 했다. 남편의 설명을 듣고 세간살이 별 것 없는 작은 방에서 미디어매체를 끄고 책을 읽고 글도 쓰며 보내는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리고 자기가 살던 생목동부터 조례동까지 교차로부동산에서 월세방을 찾으며 이곳에는 누나가 살았고 저곳에는 이모가 살았단 이야기를 곁들였고, 3박 4일간의 순천여행에서 지내볼 동네들을 둘러보자고 했다. 


남편과 두번이나 함께 본 영화 <헤어질결심>에서 서래와 해준의 밀회 장소로 등장했던 송광사에서 점심으로 더덕구이를 먹고 송광사에서부터 선암사까지 산길을 걸어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맛집에 들러 저녁을 먹자고 했다. 다음날에는 맛집 하나를 찍어 점심을 먹고 순천만 습지 스팟 한군데를 오후내 걸어보자고 했다. 여행의 마지막날 남편이 회의가 있는 동안에는 홀로 시간을 보내며 순천의 오래된 동네를 걸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남편의 계획대로 봄을 마중나온 것처럼 부서지는 햇살 속에 길을 따라 걸으며 자주 이곳에서 살아보는 상상을 했다. 송광사를 갔고 더덕구이는 먹지 못했고 더덕무침이 반찬으로 나온 정식을 먹고 고된 산행 끝에 어둑어둑 해질 무렵 선암사에 도착했고, 동네아저씨들이 모여앉아 화투를 치는 시끄러운 휴게매점에서 화덕난로를 등지고 추위를 녹이며 50분이 넘도록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시내에선 동네사람들에게 맛집으로 소문났다는 생선구이집에서 예상치 못했던 생일 미역국을 먹었고 숙소에 돌아와서 후루룩 잠이 들었다. 다음날 순천만 습지 근처의 꼬막정식집에서 배부르게 꼬막정식을 먹고 걸어서 순천만 습지 부근 낭뜨정원과 문학관을 둘러 걷고 시내로 돌아와선 살아볼 동네구경을 하고, 저녁엔 원도심 근사한 와인바에서 남편의 순천 프로젝트를 함께할 업무파트너를 만나 순천에서 살아볼 계획을 구체화했으며, 그보다 그 앞 순천만에서부터 이미 살아볼 결심을 하였다는, 알딸딸한 상태의 취중고백을 하였다. 다음날 정신을 차리고 홀로 걸어 동네를 돌아보고 슈퍼를 리모델링한 카페에 앉아, 살아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고 그 생각은 서울에 와서까지 정리되진 않았다.   

                   

송광사에서 선암사 넘어가는 길은 고되었고, 서래가 서있던 자리는 온통 파란 기와 아래였다. 더덕무침 보다 매실짱아치가 더 맛있었고, 저녁에 먹은 생선구이집에서 반찬으로 나오는 김과 장은 정말이지 예술이었다.  


순천만 습지를 걷다가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의 배경이 된 곳이라는 팻말을 보며, 작가가 어린시절을 보낸 순천을 배경으로 썼다는 짙은 안개낀 작은 항구 라는 가상의 항구도시에서의 2박 3일간의 여행기를 다른 버전으로 상상했고, 이곳을 긴 시간 여행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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