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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Feb 17. 2023

과연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일기] 영화 '다음소희'를 보고 

영화를 보는 동안 이 영화에 대해서만은 꼭 리뷰를 써봐야겠다고 다짐을 했건만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무력감만 커졌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고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며 이 문제에 놓여진 당사자가 심지어 법적 성년이 아니므로, 그리고 켜켜히 쌓여 구조화된 병폐의 집약체, 그 압축적 착취구조로 떠밀어진 아이들의 비극적 현실이 버젓하기 때문이다. 형사 유진이 따져묻자 돌아오는 대답이란 것이 "그래서 교육부까지 가시계요?" 였던 것처럼, 그래서 결국 나 역시 뭘 어쩔 것이냐 하고 말아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자문격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TV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와 같이 종국의 심판을 위하여 이야기가 전개되길 원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고작 고등학교 3학년의 한 생이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그 상황에서부터 그 이후 그 죽음의 이유를 주변을 통해 펼쳐나가는 형사 유진의 행보를 내내 '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고통스러웠다. 추운 겨울 저수지로 저벅저벅 들어가는 소희의 맨 발이나 야외 주차장 안내를 맡은 소희 콜센터 전 동료의 맨 손이나 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하고 있는 친구의 상처투성이손 등이 명백한 국가적 학대의 흔적 같았고, 그들이 보내는 SOS 신호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빼꼼히 드러낸 상처에 심증을 굳힌 제3자이지만서도, 남의 집 사정인양 곧 성년에 다다른 이들의 인생에 개입하지도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는 무력한 시민인 채다. 그리하여 영화로 제작되는 것이 무슨 소용인건가. 오늘로 5만 이라는, 독립예술영화로써는 흥행했다 볼 수 있는 관객이 들었음에도, 영화라는 콘텐츠가, 사람들의 입소문이 그리고 무력한 문제의식이, 펜과 글이 무슨 소용일까를, 매체라는 형식의 한계를 다시 한번 상기할 뿐, 그래서 '다음소희'는 괜찮은 것인가.   


영화 <다음소희>의 소희는 특성화고 졸업반으로 현장실습 현장인 통신사 콜센터에서 징계로 받은 무급휴가 종료일 다음날 슬리퍼 한 짝만 신은 맨 발의 상태로 저수지에서 발견된다. 체온을 잃은 소희의 맨발은 드디어 기온과 외력과 무관하게 창백해진 채고, 현장감식반에 의해 슬리퍼 한 짝도 벗겨진다. 무덤덤하게 소희의 시신을 바라보던 형사 유진은 별다른 정황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살로 수사를 종결하려 하지만, 온통 새하얀 몸으로 새하얀 도포에 싸여있는 딸의 시신을 보고 죽음의 사유를 밝혀달라며 부검을 요청하는 소희 아빠와 그 옆에서 무너져내리는 소희 엄마를 보고 마지못해 처리하는듯 소희 아빠의 청에 따라 결국 추가수사를 진행한다.      


소희는 완주생명과학고등학교 애완동물학과의 졸업반 학생이다. 고3이 되면서 그녀는 재학생의 취업률과 재고용율로 평가되는 한국의 교육구조와 특성화고 운영 매커니즘 내부 가장 밑바닥에 인입된다. 동시에 법과 제도의 틈, 합법화된 비정상적 구조에서 버젓이 착취당하며 불공정과 부조리, 부패 등 한국사회의 집약된 병폐를 가장 말단의 취약계층으로 압축 경험해보는 현장실습생으로써의 자격을 취득한다. 


소희는 친구들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아이돌을 꿈꿀 만큼 재능이 유달라 보이지 않아 어떤 연유로 춤을 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안무구간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츄리닝이 다 젖도록 연습에 매진하는 동안 그녀의 친구들은 현장실습생으로 공장, 택배상하차허브, 농장 등 그곳에서도 모두가 기피하는 노동의 그늘로 매일 출근을 한다. 그 중엔 노동강도와 비인간적 대우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와 실적에 폐가 될까 학교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자퇴한 채 오빠에게 빌붙어 생활하며 먹방으로 용돈을 버는 친구도 있다. 소희는 대기업 일자리를 구하느라 힘 좀 썼다는 학교 선생의 호들갑에 하얀 정장 차림으로 면접을 보고 그 다음날로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녀는 함께 춤추며 친해진 태준을 그의 일터인 공장으로 찾아가 학교 선생의 말처럼 대기업의 사무직 노동자가 되었다고 흥분한다.  


학교선생의 말과 달리 소희가 출근한 곳은 한 이동통신사의 하청업체인 콜센터 운영 업체 중 하나로 소희는 그 중에서도 통신계약의 해지를 막는 방어팀에 배정된다. 그곳은 매뉴얼로 사람을 움직이고 해지를 요청하는 고객의 요구를 최대한 지연시키는 한편, 새로운 이벤트가 나왔다고 꼬셔 계약을 유지하게 고객을 옭아매는 부서이며, 방어율로 실적과 인센티브가 계산되어 월급명세서에 숫자로 찍히는 곳이다. 형사 유진이 알아본 바, 고용인원 중 95%가 노동강도를 견디지 못하고 퇴사하는, 그야말로 비인간적 대우가 만연한 노동의 검은 그늘과도 같은 곳이다. 민용근 컬럼니스트가 2023년 2월 17일자 보그코리아에서 언급했듯이 "다음소희를 갈아만든" 곳이다. 소희 이전에는 실적압박과 비인간적 대우를 견디지 못한 소희의 직장상사(그는 회사 주차장 자신에 자동차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모습으로 소희에게 발견되었다)의 생이 저당잡힌 곳. 소희 다음의 결과가 뻔히 예견되는, 불륜과 노름꾼, 의지박약의 개인의 특수성이 범접하지 못하는 곳이다. 


소희의 주변인들을 만나고 다니던 형사 유진은 책임있는 어른들에게 외면된 이 사건을 무력하게 접으며 사건을 종결하고, 종결 후 발견된 소희의 핸드폰에서 소희가 남겨둔 단 하나의 영상, 안무구간 하나를 완성하고 뛸듯 기뻐하는 자신의 모습을 찍은 영상을 들여다본다.  


"죽음이란 필경 한 세계의 끝일 수밖에 없지만 그 세계의 전말을 알리는 시작이 되기도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결단은 때때로 마침표가 아닌 도돌이표처럼 세상으로 되돌아와 물음을 던진다. 대체 왜 그래야만 했던 걸까? 무엇이 그 생을 죽음으로 떠밀었는가? 그렇게 누군가는 자기 삶을 지워서라도 전하고 싶었던 목소리의 여부에 뒤늦게 귀를 기울여본다. 이전의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이전의 행적을 되짚어나간다. 비록 이야기의 주인이 부재하다 해도 그것은 없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다음 소희>는 죽음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죽음 이후를 묻는 영화다." - 민용근 영화 저널리스트&대중문화컬럼니스트 보그코리아 <다음소희 갈아만든 사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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