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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Jul 14. 2023

복수의 공간은 나의 힘  

[일기] 간헐적 순천살이 그리고 서울생활 : 중간점검

나에게도 두 개의 공간이 있다. 서울과 순천, 나의 이 복수의 공간은 <무진기행>의 그것들과, 대비되는 한 쌍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얼핏 유사해보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 윤희중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것이다.


가장 먼저 직관적으로 떠오른 다른 점이라면 무진의 '나'와 나 라는 주체의 설정값의 차이겠다. 선택의 기로 그 마디마디 실리적 기준에 따라 현실적 선택을 해온 삼십대의 제약회사 중역인 '나'는 심리적 동인인 욕망을 일부 성취한 사람이고, 반면 나는 욕망은 있었으되 성취에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는 어떤 시점 물리적으로 다른 시공간이 필요했는데, <무진기행>의 '나'는 승진을 앞두고 조직적 혼란을 피해 일시적 피난처로 그 시공간에서 일시적이나마 현실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탈속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고, 나는 뜻하지 않게 공간이동의 기회를 얻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끝내 제자리인 것만 같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이 욕망의 도시를 우연적으로 재조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 모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그 시공간이 필요했지만, 그곳의 '나'는 현실을 지속하기 위하여, 이곳의 나는 삶의 태세전환을 요구받는 곳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안개'에 대한 해석도 다를 것이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싸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 <무진기행> 중  


<무진기행> 초반에 나오는 무진의 안개를 설명하는 인상 깊은 두 개의 문장 중 아마도 나는 전자에, 그곳의 '나'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욕망의 성취를 위하여 애초에 가진 것 없는 두 사람이 사용하는 보통의 기제는, 스스로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의 변수를 줄여나가는 방식, 갖고 있는 노동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일 것이었다. 서른세 살의 제약회사 중역인 '나'는 4년 전 제약회사 회장의 딸인 미망인과 결혼해 전무 승진을 앞두고 있고 친구 '조'의 대사로보면 "빽이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 그야말로 벼락출세한 케이스이지만, 무진으로의 짧은 출장을 오게 된 계기도 그곳을 떠나게 되는 중요한 결정적 이유도 바로 돈 많은 아내의 일종의 지령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무기력한 도시인으로 표상된다. '그'는 안개가 뒤덮인 무진에서 사회적 규범을 잊고 억눌린 또다른 욕망을 잠시나마 실현하는데, 이때 안개는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뿌옇고 자욱한 도시로 그를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에 반해 나는,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을 하고 그로 인한 작은 성취를 얻어가던 중 압도적인 힘에 의해 이 모든 결과들이 무화되는 경험을 한다. 한동안 흡사 폐허가 된 공간을 그저 바라만 보다가 조금씩 복구하던 중 찾은 제2의 공간에서 마주한 '안개'는 원래 그런 것, 통제 불가능한 절대적 힘의 존재를 실감하는 장소다. 비가 온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축축한 공기. 비온 다음 날 아침, 그곳의 상공은 햇볕을 투과해 본연의 색을 드러낸 것처럼 온통 뿌연색의 공기를 허공에 뿌려놓은 것 같다. 꼭 하늘에도 숨이라는 것이 있어, 비온 뒤 산에서 뿜어대는 수분과 만나 장작불을 지피는 것처럼 활활거리며 안개로 피워오르는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도록 넓게 드리워진 안개가 마을의 상공을 포위하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거리는 또렷하게 맑은 날처럼 보이고 일시적으로 열린 것 같은, 어떤 시공간의 사이 같은 유난히 청명한 거리에서 꼭 수호신의 보호받는 것처럼 마을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장면을 나는 그날 아침 결국 마주하고 만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 그것이 사는 것이라는 듯.


그리하여, 광주에서 버스로 갈아타 반수면상태로 동승한 두 명의 대화를 훔쳐듣다가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를 보았다"로 문을 열고 시작된 <무진기행>의 무진은 덜컹거리는 버스 안 어느매쯤에서 보게 되는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로 끝을 맺으며 유한되는데, 그렇게 한정되어버린 그곳 무진에 비하면 나에게 제 2의 공간인 이곳은 그저 공간이라기 보다, 다른 확장가능성을 내포한 통로 또는 보다 넓은 의미의 또다른 세계에 조금더 가깝다는 점이 가장 다르다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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