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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Aug 25. 2023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일기] 그리고 서울생활 (22)

키 176센치미터에 몸무게 60키로가 넘는 신체사이즈를 가진 나는 한국사회에서 거구인 축에 속하고 때때로 이것이 호신용 기제로 활용된다는 것을 어느 날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깨닫게 되었다. 친구 몇 과 각자 겪었던 기상천외한 성폭력 노출 경험을 이야기하다 알게 된 것이다. 백이면 백 아는 또는 알게 된 인물에게서 당하는 편인 나와 다르게 누가 보아도 물리적 열세가 분명해 보이는 친구들은 버스나 길거리 신원미상의 인물에게서 당하는, 갑작스런 덮침과 같은 성폭력 경험이 더 많다는 것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는 내가 평상시 사주 경계를 많이 하는 편이라 모르는 사람에게 한번도 안 당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나의 신체적 이유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이 말은 얼마 후 남자선배와 이야기하다가 거의 확신하게 되었는데, 보통의 남자들은 자기보다 큰 여자는 대게 무서워하니 너무 경계하고 살지 말라는 충고랍시고 한 그의 발언 때문이었다. 그 말에 나는 어이없어 하며 다행이네 내가 너보다 커서. 라고 덧붙여 말했지만 100프로 진심이었다. 하여간 나는 주변 친구들에 비하여 낯선 이로부터 기인한 성폭력 경험이 적은 편이고 그렇다고 그게 나만 피해갈 수 있어 퍽 기쁘지만도 않고, 여전히 사주 경계도 풀지 않고 살고 있다.


이렇듯 경계심이 많은 편인 나를 안쓰럽게 보는 반려인은 스스로 예민함을 단련하면서도 나에게만은 안전감을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뉴스 등에서 보이는 흉악한 사건에 반응하지 않는 편인데 얼마전 관악산 사건을 보고서는, 본인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모방범죄가 일어날 수 있으니 당분간 산에 가지말라"라고 당부했다. 둘다 씁쓸해져서 쩝쩝대다가 나는 "인적이 드문 산은 나도 못가. 난 사람 많은 안산만 간다"고 맞받아쳤지만, 그순간 일상적인 소소한 기쁨 하나가 영영 사라지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언제나와 같이 산책에 나서며 위축되지 않고 나의 일상을 평소와 같이 누리는 것이 일종의 '운동(movement)'인 것처럼 투쟁의식에 가득차 집을 나섰고 평소와 같이 홍제천을 걸어 안산 자락길까지 올라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코스로 걷기를 시작했다. 씩씩하게 더욱 팔을 흔들어대며. 오래간만에 비온 뒤 화창한 날씨와 조금은 시원해진 바람을 맞으며. 그리고 얼마 못가 그 사람 많은 홍제천에서도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고, 그 때는 어떤 아저씨가 두 손에 1키로짜리 아령을 들고 힘차게 걷다 나를 앞지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저 작은 아령도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저걸로 내 머리를 힘차게 쳤다면 내가 기절했을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무리 경계해도 뒤에서 사람이 오는 건 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여러가지로 좌절하고 말았다. 그 좌절은 내가 너무 예민해져 있다는 것 때문도 있었다. 너무 예민해지지 말아야지, 이웃을 신뢰해야지. 하면서도 그날은 어쩔 도리 없이 걷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고, 이런 나의 마음이 무색하게 산 속 풍경은 참.. 여전히 이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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