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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조 Sep 26. 2023

아빠, 조례동 그리고 노랑고래    

[일기] 간헐적 순천살이 (21)  

#1. 

그러고보니 아빠와 따로 산 지 어언 30년쯤 되어가는 중이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무렵 다른 거처를 마련해 따로 살기 시작한 아빠를 나는 특별한 용건(용돈이 필요하다던가)이 있을 때 찾아가 만났다. 내 청소년기 아빠는 아주 급할 때 사용할 수 있는, 10회짜리 쿠폰 같은 사람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아빠와 교류할 기회가 왕왕 있었는데, 내가 대학 졸업 이후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였다. 소위 운동권 아빠의 영향을 영영 받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었다. 내가 그곳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아빠는 조금 걱정했던 것 같기도 하고(자신이 더 잘 아는 곳이라 훤히 가시밭길이 보이고도 할 터였고) 한편 아주 많이 좋아했던 것 같은데, 그것은 가족구성원 가운데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는 단단한 착각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니 그 당시 나에게 아빠는 가족이라기 보다 일종의 비즈니스 관계적 개념이었고, 주변 활동가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아빠는 꽤 존경할만한 그리고 부끄럽지 않은 그 바닥의 어른이었다. 활동가들이 치뤄주는 아빠의 환갑잔치 축하영상 중 아빠로써의 기억에 대하여 묻는 질문에, 사실 아빠에 대한 기억보다 사회적 활동으로 인정받은 훌륭한 활동가인 아빠에 대한 기억이 더 많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실이었다. 그때는 남들이 말하는 아빠 역할로써는 낙제점이었을테니 나에게 좋도록 사회적 인정받는 아빠로 기억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던 것 같다. 그리하여 아빠는 내가 모르는 그의 사회활동 전력까지 덧붙여져 나에게 다각도의 아빠로 재조명되었다. 20대 끝무렵 결혼으로 어설픈 독립을 시도할 때 큰 돈이 필요했던 나는 결국 아빠의 그 마지막 쿠폰 하나를 썼고, 나의 20대에도 여전히 아빠는 나에게 특별한 용건이 있을 때(비즈니스 포함) 만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여타의 다른 가족구성원들과 식사모임 등의 핑계거리(?)를 만들어 왕래하기 시작하기 시작한 건 나까지 결혼을 한 이후였고, 그보다 더욱 결정적인 사건은 아빠가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하고 난 뒤 부터였던 것 같다. 나보다 칠팔년쯤 앞서 결혼한 언니 다음으로 나까지 결혼을 하고 난 후엔 자연스럽게 아빠도 가족모임에 초대하게 되었다. 우리집 여자들이 우리집 상황을 모르거나 이해못할 남자들과 결혼한 것도 아니었지만, 공교롭게 불통의 인간만 다섯(남동생까지 우리집은 다섯 구성)을 모아둔 우리집에서 유연하고 공감력 높은 새로운 식구 두 사람이 들어오면서 아빠를 부르는 일은 왜인지 자연스러워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때는 형부가 먼저 아버지에게도 연락해보라 했던 것 같고, 그러니 이에는 그 누구보다 형부에 공이 컸다. 나의 남편까지 포함하여 그들은 아주 훌륭한 중립지대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평화의 상태가 유지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신나고 유쾌한 장면으로만 기억되는 풍경은 아니다. 아빠가 함께 한 첫 식사자리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우린 모두 퍽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가끔은 이상했던 것 같다. 형부나 남편 앞에서 못보일 꼴을 보이게 되는 건 아닐까 전전긍긍했던 듯도 싶다. 아빠는 오래 홀로 살아 덜 깍인 사람처럼 투박했고 퉁명스러워 보였다. 대화도 늘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누적된 후엔 조금씩 익숙해졌고 언젠가부터 아빠는 빠지지 않고 가족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 큰 돈을 들여 외식도 한다. 그 순간 순간엔 알 수 없었지만 돌아보니 우리 참 많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며 언니와 회고하는 날도 생겼다. 

3년전쯤엔 아빠가 뇌출혈로 수술을 받았다. 큰 수술 이후에도 강한 기질을 타고난 아빠는 여전히 대쪽같은 품성이 꺽이지 않았지만 그간의 관계 덕분인지 그 사실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빠의 어떤 심지 하나쯤은 조금 물렁해졌는지 꼭 금쪽상담소에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상대의 말을 경청하려 하고 긍정적 반응을 하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올해 들어 내가 순천에 간헐적 생활을 하면서는 이곳으로 여행 올 명분이 생겼고, 다가올 추석때 그 두번째 가족여행이 기약되어 있다. 그리고, 그보다 3일 일찍 내려온 아빠가 현재 다른 숙소에 기거하며 지역의 활동가들을 만나며 유랑과 휴식중이다. 나는 꼭 아빠와 일상적 관계를 맺어가는 방법을 다시 배워가는 기분이 든다. 아빠는 개인주의자인 딸의 시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애쓰는 것 같다. 또는 진짜 아빠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우리는 아빠의 지인분이 하시는 한의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는 것과 다른 가족들이 순천으로 내려오는 27일 점심부터 늦은 오후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을 공동의 시간으로 정해두었다. 아빠는 계속 자신을 신경쓰지 말라고 하고, 부러 연락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점심약속이 있던 아빠가 어제 오후 함께 한의원에 다녀올 때는 한의원 앞에서 만나자는 딸의 의견에 조금 눈치를 보다 그러자 한다. 각자 살아온 방식이 달라 우린 몇 번이나 상대의 상태와 의견을 확인하는 중이다. 

40년째 계속 알아가며 끝없이 관계정립중이나 이 과정이 당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딱 하나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고정된 정답이 없다는 것. '아빠'라는 보통의 명사를 덧씌우고 있던, 그래서 자주 나의 결핍과 컴플렉스로 작동되었던 어떤 관념들이 흐릿해지고, 고유한 관계로 다시 재조직되는 중이다.               


#2.

처음 순천에 숙소를 알아볼 때 추천받은 곳은 조례동이었다. 지리고 뭐고 이 도시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던 그때 남편 나에게 설명하며 한 말은 순천의 첫번째 신도시쯤 일거라고 설명했다. 남편이 순천을 떠나있은지 오래되어 현지분에게 몇 곳을 추천 받았고, 대체로 신도시 위주로 추천을 해주셨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1순위로 조례동을 추천해준 가장 큰 이유는 호수공원을 중심으로 생활인프라가 잘 갖춰진, 안전하고 깔끔한 동네분위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이 두 가지 설명만으로 수도권으로 따지면 분당 같은 곳이겠거니 생각했다. 남편이 프로젝트로 오고갈 사무실과 조례동이 더 가까웠지만 결국 원도심에서 멀지 않은 도시재생 사업지(저층주거지 커뮤니티 활성화 전략 중 하나로 주민 의견을 들어 소규모 수선을 지원하는 정부정책 사업)였던 이곳에 숙소를 얻었은 건 순전히 남편의 취향 때문이었다. 추천해주신 분은 아마도 나를 생각해 신도시 위주로 추천하셨을 테지만 나보다 더 자주 사용할 사람이 남편이었으므로 당연히 그의 의견과 취향에 맞추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그제 조례동을 다녀오고서는 내가 순천을 잘 몰라 의견이 없었겠구나라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조례호수공원 주변

어제그제 조례동에 갈 일이 생겼는데, 그제는 여기 지역분이 소개해준(내가 막 튀겨주는 꽈배기와 도넛을 좋아한다는 말에) 지역 꽈배기 가게인 '노랑고래'에 들려보고 싶어서 였고, 어제는 가족 여행에 앞서 온 아빠와 아빠가 잘 아는 한의원 선생님께 진찰을 받아보기 위해 가게 된 것이었다. 이곳도 때마침 조례동이었다. 그제는 호수공원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호수공원을 산책하다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 '노랑고래 조례점'의 도넛과 커피를 후식으로 먹자는 것이 계획에 따라 움직인 것인데, 사실상 '노랑고래'에 의한, '노랑고래'를 위한, '노랑고래'의 날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모든 의식의 흐름이 '노랑고래'로 귀결되는 속에서 남편과 버스를 타고 조례동에 가면서 어제(어제 시점) 괴목에 갈 때는 버스에 온통 할머니더니 여기는 사람도 많고 어린 친구들도 많이 타네 했는데, 하루상간에 마주한 이 극명한 차이가 생경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다 또, 난데없는 의식이 발동해, 사람들이 이용 안 한다고 어디는 역(괴목에 가는 길에 폐역만 3개를 지났다)을 다 없애면 거긴 사람이 더 없어지는거고 한쪽은 계속 개발하면 사람들이 한 곳으로 몰리는 건데 이런 건 정책으로 잘 분산해야 하는 거 아니야 라는 갑작스런 말도 했다. 말했다시피 버스를 타고 가다였다. 서울에선 보통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만나니까 사실 세대격차, 지역격차 등을 체감할 일이 별로 없는데, 이곳에 와서는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내 의식의 흐름대로 난데없이. 

 

조례동은 예상대로 구획이 잘 나눠진 생활인프라가 잘 갖춰진 깔끔한 동네였다. 호수공원을 한바퀴 돌았고 멀리 새로짓는 대단지 아파트의 골격이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이곳에 살았어도 좋았겠단 생각은 옥수수가루가 섞여 더욱 쫄깃하다는, 나는 오분 이상 기다렸지만 막 튀겨 쫄깃하고 바삭해서 좋았던 '노랑고래'의 꽈배기를 먹을 때 잠깐 했고, 그보다는 여기 누군가 살아서 핑계김에 종종 와 사먹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공원을 나설 땐 늦은 오후에서 저녁시간대로 옮아가고 있을 때였고 우린 그곳에서 두시간 넘게 시간을 보냈다.     

호수공원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이 곳곳에 많았다. 노랑고래 도넛은.. 참말로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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