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빈조 Oct 08. 2023

순천살이가 없었더라면

[일기] 그리고 서울생활 (25)

순천에선 일주일쯤 보내고 일찍 서울로 돌아왔다. 연휴가 길었지만 그만큼 계획된 일이 있었다. 대신 다음주 다시 순천으로 짧게 다녀온다. 간헐적 순천살이의 계기가 되었던 남편의 프로젝트, 그 결과물과도 같은 행사가 드디어 다음주 치뤄지는 까닭이다. 뜻밖의 두 집 살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의 순천방문과 살이는 다음주에 한 번, 11월초 또 한 번, 이렇게 두 번 정도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지난 6개월의 시간은 뜻밖의 일들의 연속이었다.


뭐든 끈덕지게 기다리지 못하는 급한 성미의 소유자인 주제에 7월 마감의 공모전을 4월에 내어놓고 내 뜻과 다를 가능성이 높은 결과를 기다리는, 반 년의 가까운 시간은 나를 자주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어떤 시간으로 데려가 헤매이게 했다. 만약 순천살이가 없었더라면 나는, 영영 당도할 것 같지 않는 앞선 시간에 정신을 빼앗기고 현재의 시간에 내내 버둥대고 부유하며 그 몇 개월의 시간을 박제해두었을 거였다. 여전히 그 시간은 당도하지 않았고 어떤 결과라도 받아들이고 다시 같은 행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꾸준하게 반복하는 것 외에 답이 없다는 것을 이 낯선 동네를 여행하며 훌쩍 시간을 보내며 그리고 계속 하던 일을 반복하며 배운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시련과 실패는 아픔으로 다가오겠지만.  

마음이 산란해질 때 글쓰기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내 안 깊은 곳으로 몰입하게 해주었다. 대체로 꾸준하게 글짓기를 할 수 있었던 데엔 브런치를 시작한 덕분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서였다. 첫번째 작문(공모전에 두번째 도전중인) 이후 나는 스스로 스토리를 창조해내는데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두번째 작문은 소설일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순천살이를 시작하며 이 지역이 배경이 되었다고 알려진 무진기행을 다시 읽고 난 후엔 김승옥 작가와는 다른 버전의 무진여행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중간에 컨설팅 일거리가 생기는 바람에 진도는 더디었지만 순천살이를 하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구상해둔 글짓기를 계속 하는 중이고 이 글은 내년초 탈고를 목표로 한다. 그리고 어떻게 릴리즈할지는 미정이다.


그러고보니 경제적 궁핍이 찾아왔을 때는 공교롭게도 순천 인근 지역의 일거리가 생겼고, 덕분에 곤궁함을 면할 수 있었다. 내가 순천에 가있는 사이, 서울의 기존의 관계들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어떤 관계는 소원해졌고, 어떤 관계는 성장하고 무르익어가고 있구나 하고 알아채는 순간에 맞닥들이기도 한다. 화포해변의 점점 아래로 빠져들던 일몰을 보는 순간과도 같이. 자주 만나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소원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조용히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들은 새로운 기간으로의 전환을 위해 서로에게 틈을 만드는 시간 같기도 하다. 따로 산 아빠와의 첫 가족여행에 이어 두번째도 치뤄냈고, 세번째 단풍구경도 남아있다. 이 뜻밖의 순천살이가 아니었다면 영영 없었을지도 모르는 여행길이었을거다. 어쩐지 낯선 동네에서 우린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었고 그 와중에 보이지 않게 의지했던 것 같다. 우린 이제 서로간 진 빚을 조금씩 털어내고 있는 과정에 진입하고 있는 중이다.

순천 화포해변에서


     

작가의 이전글 최적의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