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빈조 Mar 13. 2023

내 발이 문제지

[일기] 3월 13일 블랙먼데이  

아침에 양말을 후다닥 신고 집안을 휘젓고 다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단 느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니나다를까 한쪽도 아니고 양쪽 모두에 구멍이 송송, 보이지 말아야할 발가락들이 구멍난 양말 틈 사이로 새어나와있었다. 얼른 갈아신고서 한참을 돌아당기다 다시 한번 무언가 잘못되었단 느낌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또다시 한쪽도 아니고 양쪽 모두에 구멍이 송송. 이만하면 내 발이 문제가 아니라 양말이 문제 아닌가 싶었는데, 있지 말아야할 곳에 무심히 툭 떨어져 놓인 장갑 한짝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그래 내 발이 문제지 했다. 나의 무신경이 문제지. 

이게 무슨 일기거리나 되나 싶지만 오늘은 하루종일 왠지 그런 날 같다. 친구에게 추천받은 <AI지도책>(케이트 크로퍼드)을 완독하고 룰루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다시 읽고 싶어졌는데, 그렇게 후다닥 들고나간 책을 지하철에서 열어보니 그 책은 <2022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집에 돌아와보니 보라색이 좀 들어있긴 하지만 두 책은 엄밀히는 헷갈리기 어려울만큼 너무나 다른 표지였다) 결국 나는 횡단하다시피 하는 이동길, 3호선 라인 어느 지하철 차량에 앉아 휴대폰으로 못다읽은 주간문학동네 두 작가의 편지글 형식의 연재글을 읽었다. 수서역에 당도해 지도앱 켜둔 휴대전화를 살피며 출구 밖으로 올라가던 나는, 나의 묵직한 에코백을 무릎으로 펑 차다시피 내려오던 사람에게 사과를 하고도 앞 좀 똑바로 보고 당기라는 욕을 먹었고, 우여곡절 끝에 만난 엄마와 마주하고는 한참을, 말 한마디 곱게 하지 않는 남동생에게 지난 주말 결국 화를 냈고 그 이후로 냉전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엄마와 오늘의 계획대로 몇 개의 집을 찍어 살펴보던 중 어느 동네 고급빌라촌이 몇 억대부터 라고 그러던데, '구경하는 집'이나 살펴보고 가자는 엄마 말에 그러려니 하고 둘러보러 올라갔다가 구멍난 양말을 떠올렸고, 왜인지 츄리닝 바람에 에코백 하나 달랑 매고 나온 것까지 몽땅 부끄러워졌다. 매끈하게 꾸며진 '구경하는 집'에 들어서서는 발가락 사이에 양말을 끼워놓고 돌아당기는 내내 발가락에 힘 주는 것에 온통 신경을 쓰다가 엄마가 광고에서 보았다는 그 가격보다 무려 20억이나 비싼 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누가 쫒아내지도 않았는데 후다닥 그 집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엄마 차 안에서 이런 곳에 올 때는 옷도 좀 신경을 써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또, 엄마도 무안했구나 하며 내내 신경을 쓰다가 집에 도착하기 직전 기대하지 않았지만 WBC 8강전 탈락 소식까지 듣고 나니 하루종일 낭패라도 본 것처럼 기운이 쑥하고 빠졌다.


하루종일 나의 꺽인 마음을 위로 하는 차원으로 꺽여져 있던 꽃들을 정리하고 옮겨심지 않은 화분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오늘도 야구를 볼거고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응원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근사한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