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막

소설 <PART - one> # 표적 ②

by 수빈조

숙고의 시간을 가진 후 하루이틀 내 가부를 정해 말씀드리겠다 했지만 사실 랄라에게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문제해결에 애를 쓰고 있는 후배의 요청이라는 점에서 명분이 앞섰다. 그나마의 실리를 찾는다면 율무의 요청에 즉답을 피하는 정도였다. 사건은 명료했고 어디에나 있을 법했다. 율무에게 기대했던 답변을 시원하게 해주지 못한 것은 미안했지만 망설이는 분위기를 내비친 것에 랄라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언제나 문제를 제기하는 측이 불리했고 신중할수록 좋았다. 모두가 되도록 덜 다치는 방향을 고민하고 싶었다. 결국 다 같이 잘 살아보자고 하는 일이었다. 율무는 자신도 단번에 간청에 응한 것은 아니라며 랄라를 이해해주었다. 율무에게서 여유로움이 느껴졌고 랄라는 조금 조바심이 났다. 그녀는 상대가 자신과 같이 이 험난한 문제의 해결자로 나서게 될 것을 꼭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율무가 전한 사건의 내막은 이러했다. 민지는 센터장 C의 외부일정에 자주 동행했고 퇴근시간이 다 되도록 미팅이 늦어질 때가 왕왕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센터장 C가 늦은 시간까지 고생한 민지에게 저녁식사를 함께 하겠느냐고 제안했고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으며 그 뒤로도 자주 식사자리에 동행하게 되었다고. 식사자리는 때때로 단둘일 때도 있었다고. 그렇게 처음 한 두번의 식사 자리는 어느 순간부터 당연한 수순이 되어있었고 둘은 종종 반주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센터장 C가 민지의 손을 잡았고 그 다음에는 어깨를 그 다음에는 포옹이었다는데, 그렇게 스킨십이 발전할 때까지 민지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는 상대가 무안 하지 않을 수준의 대응 언어를 찾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이 업무적 관계가 불편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한 마지막 스킨십이 있은 후 민지가 당황해하자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며 사과를 했고 별일 없이 문제를 덮고 지나가려 했으나, 어느 날부터 센터장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민지는 불안해졌다는 것. 센터장에게 혹여 자신이 그 일로 업무적 불이익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 차 가볍게 문제를 제기했는데, 되려 C가 인사권자인 자신의 권한에 항명이라도 한 것처럼 윽박지른 것. 그날 이후 직속 상사인 실장P로부터 괴롭힘을 받아오고 있다는 것. 실장 P는 C가 어느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해 온 인물이라는 점. 실장 P는 C가 어느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해 온 인물로, 그러니까 C로부터의 성폭력과 C와 긴밀한 관계인 P의 직장 내 괴롭힘이 민지에게 한 번 이상 반복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민지는 같은 실에서 가깝게 지내온 모모에게 고민을 토로 했고 모모는 당사자들의 공식적인 사과와 조치를 조직에 요청하는 것이 좋겠다고 민지를 설득했으며 율무에게 이 과정에 힘을 보태달라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 그리하여 율무가 랄라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랄라는 율무의 차분한 말투 덕인지 아니면 듣기도 전에 그 다음의 상황이 예견될 정도로 전형적인 이야기 전개 때문인지 상황을 전해 듣는 내내 그다지 놀라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분노가 일지 않았다. 그저 권력을 가진 남성들은 죄다 동일회로로 작동되는 것인가 의심을 한번 정도 한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성취욕을 약점으로 잡힌 똑똑한 여성들에 대해서도 떠올렸다. 자신과 나인과 민지와 그 밖의 몇몇 선배언니들의 얼굴이 대뇌의 어디선가 한 번씩 떠올랐다 사라졌다.


민지는 직원들 사이에서 번뜩였고 한껏 도드라져 보이는 사람이었다. 사업계획서라는 설명서에 써진 대로 일을 하는 센터 실무자들에게 연구페이퍼 같은 센터장 C의 문서는 은유와 함축의 언어로 점철된 한 편의 시와 같은 것이었지만, C의 현학적인 언어를 민지는 곧잘 이해했고 그의 말들을 새롭게 해석해 사업계획 문서로도 기가 막히게 정리해냈다. 그런 민지에게 사실 랄라는 묘한 경쟁심을 느낄때가 많았다. 센터 직원들은 그녀의 페이퍼를 보며 노후주택지가 새 아파트로 재개발된 수준이라고 쑥덕거렸다. 센터장 발신으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내려온 문서들을 보며 랄라는 센터장의 생각인지 민지의 생각인지가 종종 헷갈렸다.


그녀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K에 이어 C가 센터장 업무를 넘겨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였다. C는 취임 후 얼마 안되어 새로운 운영전략을 짜겠다며 각계로 내로라하는 전문가 그룹을 구성해 의견을 청취하고 다녔다. 실장P를 대동하고서였다. 입주그룹이자 지원그룹의 상태를 1부터 5단계까지로 등급을 매겨놓고 회계·세무, 홍보·마케팅, 판로개척, 투자연계 등 단계별로 맞춤지원을 하겠다던 초대센터장 K의 센터 사업계획은 자연스럽게 폐기되는 것처럼 보였다. 발전경로가 상이한 입주그룹을 등급으로 매겨 지원하겠다니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판에 내내 직면해 있던 센터 직원들도 한숨 돌리는 분위기였다. 센터 사업에 대하여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내외부 관계자들의 태세가 관망세로 전환되고 사업초기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는, 무색무취의 형편없는 사업전략이라는 비공인인지 공인인지 알 수 없는 센터장 K와 관련된 평가도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취임 40일 만에 진행된 전체 워크숍에서 센터장 C가 운영전략으로 들고 나온 것이 “창조와 혁신을 위한 배후지”였다. 랄라는 C의 구상을 실장 P가 열심히 정리한 문서를 몇 번이고 반복해 읽고 또 읽으며 오랜만에 꽤나 사변적인 글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을 뿐 그 외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자신이 앉아있는 이 워크숍 공간이 잘못 세팅되었다는 생각을 보통 했다. 리메이크업한 수준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는 이 건물이 본래 어떤 용도로 사용되던 공간일지 가늠해보느라 랄라는 눈동자만 대굴 굴려보았다. 워크숍은 센터 사무실이 위치한 2층, 사실상 2층의 주된 용도로 설명되는 오픈스페이스의 코워킹라운지에서 진행되었다. 이 오픈스페이스는 코워킹스페이스와 코워킹라운지 이렇게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코워킹스페이스는 칸막이 없이 책상과 의자, 책장이 배치돼 자율적으로 앉아 업무를 보거나 책을 읽도록 되어있고, 한 쪽에는 파티션으로 구분된 5개의 소모임공간이 있다. 코워킹라운지는 따닥따닥 붙어 앉으면 100여명까지도 수용가능한 너른 공간으로, 강연 등과 같은 중규모 이상의 이벤트 진행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었다. 여기에는 간단한 영상·음향시설이 구비되어 있고 낮은 간이 무대 앞으로 의자들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


코워킹라운지는 2개층을 뚫어놓은 것처럼 층고가 유난히 높았고 온통 하얀색으로 마감한 탓인지 한여름에도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빈 벽 사이사이 장식장처럼 우드 재질의 책장을 배치했지만 공간에 비해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해 아늑하고 따뜻한 무드를 내지는 못했다. 오픈한지 얼마 안 된 공간에서 페인트 냄새가 났고 사람들 기침소리, 의자 끄는 소리 등 작은 소리에도 공간 전체가 메아리처럼 울어댔다. 랄라는 마이크를 든 발제자에게 내내 집중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 공간에서 찾고 있었다. 단지 내에는 워크숍 장소로 쓸 만한 공간들이 차고 넘쳤다. 마루바닥이 깔린 곳도 있었고 30여명이 딱 알맞게 들어가는 회의실도 있었다. 이 많고 많은 공간 중에 왜 하필 이런 공간을 워크숍 장소로 택했을까. 센터장 C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테를 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랄라는 쯔쯔쯔 하고 혀 차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낼 뻔한 것을 겨우 참아냈다. 이것부터가 업무능력이라는 생각은 그 다음에 한 것이었다.


그렇게 30여명의 무표정한 사람들 속에 묻혀 부단히도 튀지 않으려 노력하던 랄라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앞자리 그리고 오른쪽 옆옆 자리에 앉은 민지를 쳐다보게 된 건 그녀가 문서와 센터장을 번갈아 쳐다보고 문서에 무언가를 적어가며 센터장의 발제에 꽤 심취해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초점 잃은 눈을 들키지 않으려 시선처리에 열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몹시 튀는 행동이었다. 연단 위에 올라선 센터장과 청중 차이는 60센치 밖에 되지 않았다. 어느 덧 발제를 끝낸 C가 사람들의 속도 모르고 열심히 청중의 반응을 유도하듯 두리번거렸다. 무릎 위에 올려둔 문서를 만지작거리고 문서를 들어올려 얼굴을 가리고 옆사람에게 말을 붙이는 등 부산해진 사람들 속에서 민지가 손을 번쩍하고 들었다. 랄라는 센터장이 고개를 까딱하고 신호를 보내자 민지의 뒤통수만 보고도 그녀의 눈이 반짝 하고 빛이 났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눈에 반짝 하고 빛을 내며 민지는 성장이 리니어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장단계별로 지원항목을 세분화해 자원을 배분하는 것은 되려 지원기관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는 센터장 C의 발제에 동의를 표했다. 또 영리와 비영리, 주식회사와 그 밖의 기업형태별로 칸막이를 만들어 개별 지원하게 되면 생태계가 규모화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하며, 자원의 꼬리표를 없애는 차원으로 미래 과제를 제시하고 솔루션 중심으로 입주그룹들이 협업하게 하고 그 과정에 맞게 필요한 자원을 연결하는 일종의 기획과 큐레이팅 기능을 강화하자는 말씀이 아니신지 되물었는데, 센터장의 발제가 세부적인 추진 방향까지 작성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민지의 물음은 이해한 것에 대한 확인이라기 보다 새로운 의견제시에 가까워보였다. 민지 딴에는 발제자 의중을 파악해 드리는 말씀인양 겸양을 떨었지만 랄라의 눈엔 그녀가 막 펀치를 날리고 상대의 KO패를 확신하고 있는 완벽한 승리자처럼 보였다. C는 잠깐의 침묵 후 그렇다고 대답했고 약간은 얼떨떨해보였다. 다들 센터장 K와 C의 운영계획 사이의 차이 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새였다. 그 뒤 민지는 센터장의 지시에 따라 실장 P를 대신하여 실별로 새로운 센터 운영 방향에 맞춰 이전의 사업계획서를 보완하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조타수 같은 역할을 맡았고, 그보다 센터장의 언어를 사업계획서 틀에 맞춰 재정리하는 역할을 더 많이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민지의 문서에는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정부 프로젝트와 그에 맞는 실행그룹 리스트, 분야별 협업·자문그룹을 비롯해 정부부처·기관별 지원사업 내용과 규모, 투자기관 투자특징 등 입주기관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할 자원의 소스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 뒤로도 민지의 활약은 눈부셨다. 민지는 센터의 향후 중장기 전략과제에 해당할 혁신 과제 도출을 위하여 한 달여간 진행되는 컨퍼런스를 기획했다. 그 컨퍼런스의 마지막 순서로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로의 전환과 도약을 위한 10대 과제’를 주제로 센터장의 발표가 무대 중앙의 대형 이벤트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과제별로 실행그룹을 모집해 3년간 이들을 지원한다는 대형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대형이벤트였다. 그 즈음 단지 내부는 활기로 가득했다. 어느덧 봄을 지나 여름의 한복판으로 계절이 쏜살같이 내달리고 있었다. 정주하는 사람들의 환대 속에 단지 안으로 유동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랄라의 기억 속에서 이곳의 호시절로 기억되는 유일한 때였다. 그리고 그 시절 민지의 맞수는 없어보였다. 민지가 센터장 C가 스카우트해 데리고 온 두 명의 실장을 제치고 그를 직통으로 만나며 측근 보좌하게 된 데는 전적으로 그녀의 그런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다.



커버사진: UnsplashLinus Sandvide

소설 <PART>는 one, two, three 등 총 3부로 구성될 예정이며 위 글은 그 중 1부(one)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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