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뜨거운 피가 넘치는 홍콩 뒷골목 몽콕의 카르멘 - 열혈남아
건달 조직 중간 형님 소화에게는 6년이나 사귄 마블이라는 술집 여자가 있다. 무책임한 임신 후에도 3일이나 연락이 되지 않는 소화에게 실망하고, 여자는 엄마에게 돈을 빌려 아이를 유산시킨다. 비난과 다툼이 이어지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갑작스레 비가 쏟아지던 어느 오후, 홍콩 거리에서 비를 피하다 마주친 마블은 흰색 상하의 정장을 입은 깨끗한 신혼의 모습으로 남편을 기다리며, 진작에 끊어낸 전 남친처럼, 끊어버린 담배나 권하는 소화가 떠나 주길 바라는 표정이다.
자리를 떠난 소화의 모습은 어느 바로 옮겨가 있다. 데구루루 굴러들어간 동전이 한 편의 뮤직비디오의 시작을 알린다. 무자비하게 잘생긴 유덕화의 얼굴, 강인하게 힘준 눈이 뭔가를 결심하는 듯하다. 탄탄한 몸을 드러내는 백색 티셔츠에 블랙진을 입고 더플백을 멘 그가 향한 곳은 란타우, 얼마 전 그의 집에 머물며 폐병을 진료하던 아화에게로다. 전주와 간주 사이, 무작정 기다리던 아화를 마주쳤지만, 그녀가 병을 고쳐준 의사 남친과 함께 있음을 보고 어색한 대화를 남긴 채 떠나는 소화. 아화가 남겨두고 간 유리컵을 찾아왔지만 구룡으로 돌아가는 배 앞에서 바다에 던져 버리는 소화. 다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삐삐가 울린다. 상대가 남긴 메시지를 읽어주는 교환원의 딱딱한 말투를 배경으로 가녀리지만 절박하게 달려오는 아화. 배가 떠나버린 부두에서 절망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 앞에, 소화가 나타나 거칠게 손목을 잡아끈다. 이어지는 것은 그 유명한 공중전화 부스 씬. 유덕화가 퍼붓는 키스가 거칠다 못해 장만옥의 얼굴이 찌푸려지는 듯했으나 이내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입을 맞춘다. 힘껏 긴장하여 보고 있던 내 어깨도 털썩, 이 예술적 뮤직비디오에 감읍하여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열혈남아』는 갱스터 무비로 불리지만 실은 로맨스 영화다. 유덕화와 장만옥의 공중전화 부스 씬, 숱한 영화를 보았어도, 나는 이처럼 가슴 저미는 키스를 보지 못했다. 내일이 없는 연인, 모든 걸 던져 버리는 사랑. 짧은 키스 신만으로 그 고독과 허무를, 그리고 암울한 젊음을 처절히 보여 준다. 『열혈남아』는 홍콩 누아르 계열로 분류되지만 다른 작품과 완전히 다르게 현실적이다. 폼나는 구타, 비현실적 대결 대신, 실제로 눈을 돌리고 싶은 잔혹한 장면이 이어진다. 분장이라 보기엔 리얼리티가 지나칠 정도로 맞은 얼굴은 부어 있고 입에서는 피 섞인 침을 줄줄 흘린다. 상대적으로 과하게 비현실적인 비장한 음악이나 스텝 프린팅 기법이 대결 직전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날아오는 우주 총알을 쓱쓱 피하는 어벤저스식 히어로도 없고, 조준도 고정도 없이 쌍권총을 폼나게 쏘아대면 엑스트라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지는 장면도 없다. 어깨에 각이 잡힌 동생들이 "형님!"하고 외치며 주욱 늘어서는 멋쟁이 두목 구도가 아니라, 당구장이나 허름한 노점에서 내깃돈을 떼먹고 여자나 고양이를 희롱하는 건달들간 지질한 힘겨루기 일색에, 사정없이 쥐어패는 진짜 폭력이 난무한다. 대범하다기엔 무모한 배짱에, 주먹이나 좀 쓸 뿐인 그저 그런 깡패 유덕화, 한 순간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고만 쳐대는 똘끼 충만 장학우는, 바라보기조차 위험천만, 무책임하고 어리석게만 느껴진다. "나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지 않아"라는 유덕화의 말을 듣노라면, 그 집단적 불안감에 함께 휩싸이는 기분이다.
『열혈남아』를 처음 볼 때는 계속 얼굴을 가리고 싶었다. 유덕화와 장만옥의 멋짐 폭발 격정 로맨스에도 그랬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장학우가 천지분간 못하고 허세를 부리는 데는 내 얼굴이 다 뜨거웠다. 하루라도 영웅으로 살고 싶다고 부르짖으며, 폭력과 살인 속에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던 장학우의 모습이 면구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장학우는 이 영화로 1987년 홍콩 금상장영화상 남우조연상을 받는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 못지않게 그가 연기한 초하급 건달 창파의 인생이 애틋함을 자아낸 것은, 나에게뿐 아니라 모두에게 마찬가지였나 보다.
#홍콩판과 대만판의 결정적 OST 차이
#홍콩판은 실제 배우 목소리, 대만판은 표준어 구사 성우 더빙
#마틴 스콜세지 『비열한 거리』 연계 감상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