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강물처럼말해요 #조던스콧 #시드니스미스 #김지은
‘내가 더듬는 것은 무엇일까?’
‘강물을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난해 서울 와우북 페스티벌을 갔다. 우연히 SNS의 광고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의 글 작가 조던 스콧과 장편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정용준 작가가 함께 ‘돌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소식을 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연을 신청했다. 두 권의 책 모두 감명 깊게 읽은 책이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는 아이와 함께 읽다가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다.”라며 아빠가 아이에게 말하는 부분에서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당황하며 괜찮냐고 물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읽어나가려고 노력했지만, 양옆으로 페이지가 활짝 펼쳐지는 장면에서 또 울음이 터졌다. 아이는 그렇게 슬프면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며 다독여 주었다. 나는 슬픈 게 아니었다. 슬픔에 잠긴 아이에게 해 준 아빠의 말이 내 마음까지 와닿았다. 나는 속상한 아이에게 이런 따듯한 말을 해 준 적이 있던가? 그날 강연장의 분위기는 무척 훈훈했다. 김지은 선생님, 조던 스콧 작가, 정용준 작가가 만들어 낸 분위기였다. 조던 스콧 작가는 이 책은 본인의 경험을 담은 책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계기를 만들어 준 대학 시절 경험을 이야기했다. 대학 때 시 수업이 있었는데 늘 시 낭독을 학생들에게 시켰다고 했다. 그는 그 시간이 너무 싫어서 호명되면 책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면서 회피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는 교수가 자신의 책을 빌려줄 테니 낭독해 보라고 했고, 어쩔 수 없이 진땀을 빼며 낭독했다. 낭독을 마친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교수가 울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교수는 “이렇게 아름다운 시 낭독은 처음입니다.”라고 얘기해 줬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아마도 강연장에 있던 모두가 눈물을 참았을 것이다). 그 교수에게 감사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책을 나올 수 있게 해 주었으니. 강연이 끝나고 그림책에 사인을 받고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통역가를 통해 이 책을 아이와 읽고 울었다고, 이런 아름다운 그림책을 만들어 주어서 감사하다고 마음을 전했다.
어느 날 아이가 푼 문제집을 채점하고 있었다. 아이는 자신이 틀린 문제에 별 모양을 해달라고 했다. 내가 그린 별 모양을 본 아이는 어떻게 그리는 건지 알려달라고 해서 천천히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혼자 여백에 그렸는데 내가 봐도 반듯하게 잘 그렸었다.
“엄마! 나 진짜 잘 그렸다!”
“오, 정말 반듯하게 잘 그렸는데?”
“나, 재능 있나 봐!”
“진짜! 이 정도면 재능 있다고 할 수 있지!”
스스로에게 감탄하는 아이의 모습도 귀여웠지만 별 모양을 잘 그리는 것을 재능이 있다며 좋아하는 모습이 마냥 천진난만해 보여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아이는 그 후로도 문제집 여백에 종종 별을 그려 넣는다. 반듯하고 예쁜 별. 어떤 마음으로 그렸을지 상상하니 별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나는 오랫동안 요가를 배우면서 여러 번 요가원을 옮겼다. 일일 특강을 듣기도 했고 3개월만 다닌 곳도 있다. 주로 요가원 옮기는 큰 이유는 나와 맞는 선생님을 찾기 위해서였다. 같은 동작에 대해 가르치더라도 “이제는 이 동작이 돼야 하는데…”, “이거 하려면 뱃살 좀 빼셔야 할 것 같은데…” 등의 말을 들을 때면 정말 힘이 빠졌다. 수련을 마치면 자책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코로나19가 시작되었다. 남편의 회사에서는 자주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고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은 무기한 휴원에 들어갔다. 수련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줌으로 가르쳐주는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선생님을 찾았다. “오래 앉아서 일했기 때문에 이 동작이 어려울 수 있어요. 저도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해요. 모두가 같은 모양으로 할 수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곳에서 멈추고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세요.” 그동안 요가를 하면서 유연하지 못한 내 몸을 원망했었는데 그 선생님을 만나고 나를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배우는 동안 선생님이 해주었던 그 말이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다.
살면서 나의 모습을 그대로 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만큼 큰 행운이 있을까?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은 결국 다름을 기다려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인 것 같다. 유연함이 기본 전제가 되었을 때야말로 상대방을 향한 공감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