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를 둘러싼 논란은 많은 면에서 불필요하다. 왜냐하면 <대홍수>는 어떠한 메시지나 현상을 풀어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난영화의 설정에 SF 장르를 혼합해 만든 전형적인 상업영화고, 넷플릭스가 투자해 만들었으니 상업적으로 손해를 본 곳도 없다. 쉽게 말해 작품이 단순히 못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 받는 일은 뭔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올해 본 영화 중에 제일 못생겼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물론 이 일에 대한 간접적인 추론을 몇 가지 해볼 수는 있다. 하나는 몇 달 전에 개봉한 감독의 전작 <전지적 독자 시점>이다. 이 작품을 둘러싼 구설이 고스란히 후속작에도 옮겨붙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대홍수>에 대한 악평은 상당 부분 괘씸죄와 얽혀 있어,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감독과 작품을 분리해야 한다면 응당 ‘누가’ 만들었는지는 배제해야 마땅한데 이 원칙은 여기서도 지켜지고 있지 못하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다면 김기덕이나 로만 폴란스키, 우디 앨런을 떠올려보자. 감독과 작품을 어떻게 볼지는 개인의 자유지만 대부분은 이 둘을 동시에 접하게 된다. 다만 그 감독이 과거에 어떤 말을 했고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까지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일은 보통은 흔치 않다. <대홍수>의 경우는 <전독시>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고, 마침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게 된 시점이기도 해서 둘이 묶여 당시의 정동들이 어느 정도 혼합되는 듯한 감이 있다.
‘못 만들었다’는 건 영화를 비판하는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비난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전독시>에서라면 그나마 원작팬들이 감독의 발언을 논평하는 일이 이해됐지만, <대홍수>는 원작도 없고 감독도 별다른 논평을 내놓고 있지 않으니 딱히 말을 얹을 곳도 없다. 이 점에서 생각하게 되는 건 올해 극장가에 돌던 냉기다. 이제는 연례행사가 된 한국영화 위기론은 2021년 당시 <귀멸의 칼날>의 극장판이 개봉했던 당시에 새로 출범했다. 판데믹으로 극장가에 영화가 사라졌고, 그 자리를 일본영화가 채웠다는 분석이 나왔는데 이 시기의 흥행은 다소 특수한 경우에 해당했다. 그러나 2023년을 기점으로 판데믹을 둘러싼 사회적 조치가 차츰 해소됨에 따라 묵혀놨던 영화들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알던 극장가의 모습과 많이 달라진 풍경을 보게 된 것이다. 극장에 가지 않은 사이 세상이 많이 변했는데 영화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이 안에서 한국 안에서 제작된 것과 밖에서 수입한 것들 간엔 최소 3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내수영화가 시대에 뒤떨어진 구작이 된 시점에서 수입사가 평소처럼 가져온 작품들은 비교적 ‘트렌디’한 작품처럼 보이게 됐다. 바로 이 시간 속에서 ‘방화’라는 말이 부활한다. 의미와 맥락이 제거된 채로 안과 밖으로만 구분된 이 평가 기준에서 외화는 상대적으로 더 우수한 것처럼 보이게 되는데, 어쩌면 이는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뒤따른 부작용인 것도 같다.
<기생충>이 세계에서 주목받은 이후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올라갔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봉준호가 기생충을 수상하던 때 했던 말인 ‘로컬’은 반대로 한국영화의 자아분열로 이어진다. ‘전국구급’ 영화가 있다면 반대로 국내에 머무르는 국소 영화가 있다. 엄청나게 큰 집단과 작고 사변적인 집단이 한 자리에 공존하는데 이들 모두가 한국영화로 묶인다. 문제는 이 안에서도 국제 영화제에 출품되거나 해외 플랫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로컬’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시나 피자, 햄버거나 김치 같은 것처럼 한국영화에서 국적성을 따지는 건 더는 무의미해졌다. 이 안에서 한국영화는 세계의 다른 영화들과 경쟁하며 비교돼도 무방하게 됐지만 반대로 그만한 퍼포먼스를 증명해야만 하게 됐다. 오히려 <미키17>처럼 배우나 감독으로 영화의 국적을 설명할 수 없게 됐고, 이런 상황에서 ‘국내’를 노리는 작품은 철두철미하게 ‘빈곤한’ 로컬로 남는다. 마치 제1세계와 제2세계로 국적이 나뉘는 셈이다. 이 상황이 문제되는 건 작품에 대한 평가가 극단으로 나뉘는 일만이 아니라 영화에 관한 등급이 나뉘는 일도 포함되어서다. 그나마 극장에서 개봉해서 유통되는 쪽이라면 더 낫지만, 영화제나 일부 상영관에서만 볼 수 있는 독립영화들이 있다. 어쩌면 이쪽이야말로 정말로 로컬의 카테고리에 더 어울리는 것일 텐데 사람들은 이 영화들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마치 한국영화가 아닌 것처럼 애초에 계산에 넣지 않는다.
제1세계와 제2세계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제3세계 독립영화는 논의대상에도 오르지 않고 있다. 특히 연말에 한해를 결산하는 평론가들의 리스트를 보면 그런 생각이 더욱 심해진다. 한쪽에서는 한국 영화가 망했다고 말하는 ‘진단’이 있는 한편, 반대편에서는 개봉했던 독립영화들을 목록에 꼽는 경우가 무척 많다. ‘한국영화’가 망했다고 말하는 것에는 이들 독립영화도 포함되는 걸까? 여전히 좋은 영화들이 있고, 이들에 대한 소외나 홀대가 예전보다 더 심해진 것도 아니다. 변한 것은 ‘극장’과 ‘정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한국영화가 극장개봉과 관객수로 판가름난다면 여기서 독립영화는 애초에 고려대상이 아닐 수밖에 없다. 작게는 몇백 명, 많게는 만 명 단위로 집객하는 이들 영화에서는 도리어 ‘흥행’이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들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의 개발이다. 그게 넷플릭스가 되었든 뭐든 간에, 극장에서 개봉하는 일이 어렵다면 적어도 돈을 주고 볼 수 있는 VOD 배급 환경이 있어야 한다. 볼 수 없다는 건 인식할 수 없다는 뜻이고, 이들 독립영화를 ‘로컬’의 범주로 돌려놓지 못한다면 한국영화는 결국 국적이 아니라 극장을 기반으로만 사고하게 된다. 따라서 정책적인 면에서의 보완도 필요한데, 이를테면 극장이라는 개념을 대하는 태도다. ‘배급’이라는 말에 중간마진이 들어가는 순간은 넷플릭스를 통한 유통에 여러 중간 담론들이 가능한 이유와 같기 때문이다.
대체 비평적 기능의 최대치란 무엇일까? 이 물음을 제미나이에게 묻자, 아래와 같은 답이 돌아왔다. “비평적 기능의 최대치는 작품을 닫힌 결말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영원히 열려 있는 질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끝난 곳에서 비로소 다시 시작되는 대화, 그것이 비평의 정점 아닐까요?” 정석적인 답변이지만, 이 답변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도 생각해보고 싶다. 영원히 열려있다는 말은 결국 끝나지 않는 말과 같아서, ‘다시’ 시작된다는 말과는 거리가 있다. 대개 극장의 문을 나서는 일이 그와 같은 지적에 대한 근거가 되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영화를 기억하는 동안이 곧 영화를 ‘보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영화를 잊지 않는 한 영화는 ‘영원히 열려 있는 질문’이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결국 비평의 기능은 무하한이 아닐까 한다. 무하한이란 측정할 수 있을 정도의 바닥이 없다는 것으로, ‘닿지 않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영화를 생각하며 특정한 결론에 다다르려 하지만, 끝내 생각은 끝나지 않는다. 영화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은 이미 ‘영화’가 무엇인지를 잊는 때와 같으니 ‘영화’에 대한 논평도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영화’에 대해 말하는 일은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바닥이 없다. 비평적 기능의 최대치란 이처럼 끝없이 추락하거나, 아니면 손을 뻗으려는 행동의 반복적인 시도를 동반한다. 아직 구해내지 못한 기능들이 작품 안에 있으리라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탐구를 멈추지 않게 한다.
생각해보면 답을 구하는 것과 상대를 구하는 일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이 둘은 기본적으로 대상에 손을 내민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답을 구하고 싶은 사람은 사실 답을 ‘구출’하고 싶은 것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상대를 구출하려는 이는 그가 어떤 상태나 개념으로 구해지기를 바라는 것일 수 있다. 다른 담론들에 오염되거나 찌들기 전에 신속하게 구해내야 한다고 본다. 이는 ‘구출’이자 동시에 ‘격리’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구출’은 영화 안에 그것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나머지 여러 것들도 존재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것 하나가 영화적으로 의미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냥 있는 그대로 내버려둬도 별문제는 없다. 영화 자체를 소비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영화 안에서 의미를 구출해내는 일은 자신이 발견한 하나를 지켜내고 싶다는 마음에 의존한다. 영화에서 눈에 띄는 단점이 한두 개는 있다는 것이고, 이를 잘 알기에 반대로 지켜야 할 하나를 선출하게 된다. 영화를 전부 구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지켜야 할 하나만큼은 있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에겐 이와 같은 태도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는 “모두를 구할 수가 없다”는 트롤리 딜레마이고, 나머지 모두와 바꿔서라도 구하고 싶은 ‘하나’다. 모든 게 가라앉는 와중에 반드시 구하고 싶은 하나라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어야 할까? 비평의 처연함은 이 대목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 영화 하나를 구하거나, 영화의 전부를 바쳐 자신의 일부를 구하거나.
영화가 무하한인 이유는 이 물음에 대해 저마다의 답을 내놓을 수 있어서다. 바닥이 없는 만큼 깊고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사람에 관해서도 그렇지만 영화를 두고서 ‘알 수 없다’고 문득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다. 사람/영화는 단 하나로 기억으로도 살아갈 수 있고, 반대로 단 하나를 잃어서 삶을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정말로 작은 게 어느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것일 수 있다. 더군다나 그게 자기를 이루는 핵심 기억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처럼 상대방에 대한 연민과 이해가 한 자리에 있기에 생겨나는 여러 오해가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영화에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 스스로가 얻고 싶었던 ‘답’일 수 있다. 긴급함에 호소하는 여러 문제들을 풀다 보면 어느샌가 그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나’가 바라는 이상향임을 알게 된다. 피해자에게는 조금은 더 따듯한 연민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거나, 사건을 너무 과도하게 묘사하면서 이미지가 감각을 집어삼키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생각을 이어가면 영화에 답을 바라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답이 없다고 느끼는 건, 상대를 구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어쨌든 상대방과 대화할 여지를 차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점이 문제가 되는 건 애초에 영화에 하한선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닥을 찍은 것만 같은 영화도 어느 한 곳은 들여다볼 만한 구석이 있다. 단지 나머지 모두가 별로로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