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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May 22. 2021

사형이 아니라 선고 유예입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


1.



꼰대라는 말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누군가는 젊은 세대에게 꼰대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열심히 신세대 ‘연구’를 한다고 했다.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었던 책이 바로 『90년대생이 온다.』이다. 90년대생으로써 이런 현상을 보며 들었던 생각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90년대생 또한 다른 세대에게는 꼰대처럼 보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려는 건 후자에 관한 것이다.



<내언니전지현과 나>(2020)는 일랜시아라는 고전 클래식 게임을 ‘여전히’ 하는 유저들에 관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공감 가는 면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게이머’ 세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려서 게임을 접한 이들에게 게임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맞물리고, 이는 게이머 세대라는 하나의 현상을 만든다. 이들은 게임이라는 행위에 익숙해서 삶의 모든 것을 게임화하고, 삶의 목표는 곧 게임의 ‘미션(mission)’이 된다. 이를 설명하는 좋은 용어로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라는 게 있기도 하지만. 나는 <전지현>이 보여주는 게임 속 세상에 더 관심이 있다.



게임 속 세상을 말해보자. 개중에서도 관계를 먼저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현재 30대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부모들은 아이가 게임을 하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고 한다. 이들은 어려서부터 게임을 접하며 자랐고, 게임이 무엇인지를 잘 알며, 그래서 자녀에게 게임이 어떻게 다가올지를 잘 안다. 즉, 이들에게 게임은 미지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는 유해매체에 대한 대물림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만화를 접해보지 못했던 어른들이 70~80년대생들에게 만화는 유해매체라고 말했던 시절이 그렇다. 그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두려워했고, 이에 따라 그곳을 금지된 세계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게이머 세대에겐 게임이 그들만의 장소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어른들은 게임이 뭔지 잘 모르고, 무조건 꼴통이고, 그러니 말도 섞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려우나, 어떤 면에서는 게이머 세대가 게임을 기성세대의 ‘꼰대감성’으로부터 도피할 장소로 지정한다는 인상이 든다. “어른들은 몰라요”의 강화판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의 10대가 6.25 사변과 5.18 광주항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와 반대의 것도 가능해야 한다. 50대나 60대가 게임 속 세상을 이해하는 게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게임 속 공간을 게이머 세대의 것으로 규정짓는 행위가 문화적 전유에 대한 방어가 될 수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2.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보자. 위의 단락에서는 ‘여전히(Still)’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여전히’라는 말은 이전에 있던 것이 아직도 있음을 지적하는 현재진행형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콕 집어 말하자면 이 ‘여전히’라는 것은 기다림에 대한 감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르자면, 일랜시아의 유저들은 이곳에 남아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들이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게 옳지 않을까?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서… ‘여전히’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을 재고해보자. 결론의 시기를 정해놓는 뉘앙스의 ‘아직(yet)’보다는 한결 낫지만, 그럼에도 ‘여전히’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 변화를 재촉하는 듯한 인상이 있다.



“다 숨었니?-아직이야.”라고 말하는 숨바꼭질 놀이는 상대가 자신을 찾아줄 것을 전제로 하지만(구로사와 아키라, <마다다요>), ‘여전히’라는 말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절망감, 혹은 미래를 기다리는 이들의 무한한 기대감에 더 가깝다(질 들뢰즈, 『소진된 인간』). 중요한 건 ‘여전히’라는 말에 따라붙는 두 개의 감정이 서로 모순되거나 상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절망과 기대는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다. 이것들은 양가적 감정이 아니라, 결코 밝혀지지 않을 중앙의 공동 주변을 맴도는, 일종의 유령과도 같은 것이다. 들뢰즈가 베케트의 극에서 주변부를 빙글빙글 도는 연기자들의 행위의식에 집중했듯이, 우리에겐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장소가 있다.



일랜시아는 그런 장소다. 일랜시아는 오래도록 업데이트가 진행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서버가 내려간 것도 아니었다. 이곳은 그냥 폐허(혹은 공터)로 남아버렸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마무리된 게 없었고 이에 따라 이곳은 하나의 맹점이 되었다. 이 맹점에서는 말 그대로 보이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으므로 그 어떤 일탈도 가능하다. 그래서 일랜시아의 유저들은 현실 사회에서 게임 세계로 일탈하러 온다. 이때 일탈은 일종의 ‘사회적 무규범 지대로서의 축제’가 된다.



여기서 한 장의 짤방을 떠올려보자 “축제가 열리는 건가요?-아니요, 이건 장례식입니다.” 만약 당신이 아리 애스터의 <미드소마>(2019)를 보았다면, <전지현>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자살 의식이 죽음을 축복처럼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미드소마>와 <전지현> 사이에는 현실과 게임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지현>의 자살 의식은 죽음이라는 예외 상태로의 진입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조르조 아감벤, 『예외 상태』). 일랜시아의 유저들의 자살 의식은 그들 자신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벌거벗은 생명들은 추억의 난민이 되어 일랜시아를 떠돈다. 하지만 이들이 하는 건 미완의 술래잡기라서 그들을 찾아줄 술래 같은 건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술래 없는 술래잡기에서 잡힘당해야 할 이들이 숨어다녀야 할 이유는 있을까? 오히려 그와 반대일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현실 세계로부터 숨기고자 했고, 이에 따라 선택된 게 바로 일랜시아였다고 말이다.



3.



<전지현>은 게임과 현실을 교차시킨다. 나이 먹고 게임이나 한다고 구박받는 사람도 있고, 게임을 통해 연인을 만난 사람도 있으며, 아이템 사기를 당했음에도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세세하게는 달라도, 이들 모두는 게임에서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이런 구성에도 의문은 있는데, 의도적으로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사람들만 모아놓은 것 같다는 점이다.* 물론 감독 본인의 연령대나 유저들 사이의 공감대를 고려해야만 한다. 굳이 의도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묘한 구성은, 이들이 어쩌면 ‘망한 게임’이라는 말을 ‘망한 나라’의 입을 빌려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요컨대 이들은 소위 말하는 ‘좆망겜’을 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헬조선을 살아가는 ‘좆망캐’로서의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각주: 박윤진 감독은 인터뷰에서 "아무리 찾아도 40대 유저는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업데이트도 되지 않고 서버 종료도 되지 않는 게임 안에서는 어떤 종류의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 반대인 퇴화도 마찬가지다. 즉 이들 캐릭터는 장소 안에서 제자리를 맴돌기만 할 뿐,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로 박제될 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여전히’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려보아야 한다. 우리가 오랜만에 만난 상대에게 ‘여전하구나’라는 말을 건넬 때, 그게 칭찬으로 다가오는지 아니면 험담으로 들리는지, 를 구분하게 되는 맥락을 따져보도록 하자. 여전히 그 모양 그 꼴로 살고 있느냐는 비판일 수도 있지만. 변한 게 하나도 없어서, 말하자면 내 기억 속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해줘서 고맙다는 의사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개의 방향에서 ‘변하는 것들(variable)’에 대한 거부감이 은연중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일랜시아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의 감정이 이와 같을 것이다. 일랜시아는 변치 않는 자신에 대한 안심이기도 하지만, 변화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두려워하게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는 초등학생, 중학생이던 이들이 이제는 사회로 나갈 때가 되었다. 마음은 여전히 어린 시절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사회적 시간을 따라가야만 한다. 여전함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자아를 구성한다면, 여전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삶을 살아가게 한다. 그렇다면 둘 중 우위에 서는 건 무엇일까? 자아가 있기에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살아가야 하기에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영화 속 유저들의 인터뷰를 보면, 일랜시아에 접속하는 일은 변화하는 현실 안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처럼 보인다. 마치 들뢰즈식의 접속처럼, 이들은 변하지 않는 것을 교차해 변화를 위한 기원을 만들어보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원은 불가능하다. 그 대신 무수히 많은 탈주와 접속만이 반복될 뿐이다. 이러한 접속들이 무한한 가능성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이는 곧 불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일랜시아라는 장소가 주는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을 테다. 일랜시아는 유예된 장소다. 그곳은 소진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장소이다.



덧붙임: 이 영화를 두고서 "고인물들의 좆목질 자랑"이라고 비판하는 일은 초점이 어긋났다고 본다.



덧붙임 2: 일랜시아가 정식 오픈한 1999년은 종말론이 한창 흥할 때였다. 하지만 세계는 종말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유예되기만 할 뿐이다. 일랜시아라는 게임이 갖는 의식도 이와 유사하다고 본다. 나는 종말이라는 단어에서 해변의 풍경을 상상하곤 하는데, 실제로 많은 매체에서는 해변과 바다 지평 너머가 깊은 단절의 순간처럼 여겨지곤 한다. <산책하는 침략자>라던가 <사냥의 시간>, <로마> 같은 영화들을 떠올려본다면 그렇다. 여기서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종말의 순간은 해변을 바라보면서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지평 너머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현재와 단절된 새로운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어쩌면 이는 파도의 속성에 기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파도는 늘 같은 반복을 보여주지만 바로 그 점에서 계속되는 차이이기도 하다. 끝없이 당기고 멀어지는 유예의 광경인 것이다. (Dedicated to Ozu)



덧붙임 3: 어쩌면 이 종말론은 세계가 멸망하는 것보다 내가 죽는 게 더 빠르겠다는 점을 깨달아버린 어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빌리 엘리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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