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차미 Oct 26. 2021

현실과 기억은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다

<듄>(2021)


드니 빌뇌브의 <듄>(2021)을 보며 느낀 건, 드니의 개인적인 스타일이 잘 녹아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드니의 작품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본 <폴리테크닉>(2009), <그을린 사랑>(2010), <컨택트>(2016),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서 보여줬던 카메라 스타일이 이번에도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많은 평자들은 빌뇌브 영화 특유의 환상성이 카메라 감독 로저 디킨스의 손끝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이보다 더 근원적인 면이 빌뇌브 본인에게는 있다. 그리고 나는 빌뇌브의 <듄>을 맵핑과 알고리즘이라는 기술 용어로 설명해보려 한다. 먼저 전자에 관해서는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 숏을 떠올려 볼만 하다. 부감 숏은 화면의 대상을 세계 안으로 가두어 놓는다는 인상이 강한데, 이는 마치 이 세계에서 그의 좌표를 공공연히 하는 것과도 같다. 이런 면이 오늘날 ‘맵핑(Mapping)’이라는 부르는 개념과 유사하다.


이는 데이터 값을 일대일로 대응해본다는 뜻인데,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걸 현실에 일대일로 대응하여 소환해내는 ‘구축의 작업’을 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청사진을 그려본다.” 정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청사진은 아직 CAD가 없던 시절에 직접 손으로 그려 완성하던 건축 설계도를 뜻한다. 그래서 청사진을 보면 이 건물이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를 면밀히 알 수 있고, 또 건축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 지도를 그려본다는 건,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는 것과도 같다. 맵핑이라는 말에는 그보다 더 복잡한 의미가 있다. 맵핑은 개인이 세계 안의 좌표를 지닌 채로 맵의 어두운 부분을 탐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자신이 가려는 곳을 점 찍으면 캐릭터가 실제로 그곳에 감으로써 맵의 어두운 곳이 밝혀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맵핑이란 단순히 프로그래밍이나 건축의 용어로만 사용되지 않고, 우리네 삶을 구상하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다. 


맵핑은, 체스나 바둑처럼 자기가 구상하는 걸 판 위에 일대일로 대응시킴으로써 삶의 전체적인 면을 계획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맵핑이다. 기본적으로 이는 고도의 머리싸움이지만 어쨌거나 면과 선의 조합이라는 점에서 디지털 시대의 픽셀이나 폴리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지 근래에 맵핑이라는 말에서 생겨나는 오류는 자신이 구상하는 것과 그에 대한 대응 면 사이에 올바른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의 컴퓨터는 데이터를 저장할 때 파일시스템 항목의 쉘을 일대일 좌표로 기입해 넣는데, 이런 방식에서 일부 쉘이 유실될 경우 데이터에 표면적으로는 접근이 불가한 현상이 벌어진다. 이를 해결하려면 별도의 복구 프로그램으로 나머지 쉘들을 보존해주어야 하는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왜냐하면 깨진 데이터는 마치 썩은 귤처럼 박스 안에 담긴 다른 귤들도 점진적으로 썩게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아는 기억에서 일부 장면이 유실될 경우 기억 전체에 접근이 불가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기억에서 몇몇 장면이 ‘이상하다’고 느낄 경우, 그런 기억 전부를 부정해버리게 되는 건 시간문제이다. 오늘날 맵핑의 문제가 기억과 연결되는 건 이 대목이다. 기억을 실체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20세기 초 무렵에 기억이란 ‘꿈’으로 정의되었다. 이로 인해 ‘꿈’을 ‘불러온다(Recall)’는 말과 ‘되살린다(Remind)’는 말에 구분이 생겨났다. 전자의 경우는 좌표를 아는 상태에서 그곳까지 가는 법을 잊은 것을 뜻하고, 후자의 경우는 좌표 자체를 잊어버린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전자가 프루스트적인 재배치를 겪는다면 후자는 베르그손적인 ‘지속’을 배운다. 내가 생각하기에 빌뇌브가 기억을 다루는 방법에는 이러한 두 가지 갈림길이 있고, 이런 가정은 부감 숏 같은 미장센적인 요인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경향이 있다. 


그 전달 방법이란 이렇다. 빌뇌브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회상하는 장면 바로 전에 인물과 세계를 모두 잡는 풀 숏을 삽입하곤 한다. 마치 인물의 세계로부터 기억이 맵핑된다고 말하려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런 맵핑은 물성이 없는 디지털적인 것이어서 오히려 더 손실에 취약하다. 이야기의 몇몇 순간에서 인물은 자신이 하는 것과 자신이 보는 세계 사이에 어떠한 오류가 있음을 느끼게 되고, 바로 이때 기억은 하나의 균열로써 뒤틀린다. 그리고 이 균열을 채우려는 시도는 기억을 불러오고, 되살리는 두 개의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손상된 기억이 원래의 배치와는 다른 배열로 돌아오기에 같은 내용으로도 다른 미래가 만들어진다. 후자의 경우는 손상된 기억과 손상되지 않은 기억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 다른 내용의 같은 미래가 만들어진다. 


<듄>은 원작이 있는 작품이므로 후자쪽으로 진행된다고 보는 게 옳다. 이미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그 미래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과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채워 넣으면 된다. 우리는 이를 ‘각색’이라 부른다. 이때 정말로 있었던 일과 미래에 일어날 일은 하나의 내용으로 합쳐진다. 이게 바로 <듄>의 주인공이 겪는 자기 환영의 세계이다. 그가 겪는 환영은 이미 내면에 있기에 모든 걸 아는 상태이지만, 그곳 좌표까지의 맵핑이 끊긴 상태라 그걸 불러오는 과정이 면밀하지 않다. 그리고 이게 이미 자신의 기억임을 알기에, 그는 이런 환영을 미래를 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라던가 예언이라던가 하는 건 현재의 자신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일 때만 성립하는 개념이고, 이미 내면에 자리한다면 그건 단지 현재에 불과할 뿐 동떨어진 시간은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떻게 미래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일까. 우리는 정해진 규칙으로 미래의 양식을 현재로 조건화하는 개념인 알고리즘에 대해 말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알고리즘은 최초로 설정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알아서 나아간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때 알고리즘은 우리의 예상보다 앞서 나간다. 즉, 우리의 연산 능력을 초과해 그보다 더 앞서 나가므로 우리로서는 그들이 맵핑해가는 미래를 쉽게 따라갈 수 없게 된다. 알고리즘이라는 게 결국 우리에서 비롯된 씨앗임에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기에 이건 마치 ‘예지’처럼 보이게 된다. 이를 두고서 우리는 ‘직감’이라는 표현을 쓴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태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바를 토대로 예지되는 작은 미래 말이다. 그러나 살아보면 알듯이, 우리가 격자 형태로 가두어 놓은 삶의 경험은 때때로 빗나가곤 한다. 이로 인해 직감이 깨어지고, 새로운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듄>에서 주인공과 그의 어머니가 지닌 능력은 미래를 예지한다기보다 모종의 기시감처럼 묘사되는 면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겪는 몇몇 기시감은 이러한 알고리즘의 개발로 인해 벌어지는 하나의 소동극이다. 정보를 체계화하는 방법론의 발달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면까지 정보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나도 모른 내 취향이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물화라 할 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정보가 오히려 나의 기억을 구성해버린다는 점이다. 이른바 ‘나’ 없이 이루어진 ‘내’ 기억, 그에서 비롯된 기억에는 내가 없는데 만약 이게 모종의 예언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굉장히 섬뜩한 일 아닐까. 내가 없는 나의 미래란 일반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듄>은 내가 있는 나의 기억을 구성해가려는 미래시의 여정이라 할 만하다. 미래시란 해외에서 먼저 서비스한 게임을 국내에 들여올 때, 그동안 이루어졌던 업데이트 내역을 토대로 국내에서도 대강 이런 시계열이 유지되리라는 점을 예측하는 행위이다. 게임에서 테스터들이 비공개 테스트 내역을 외부로 유출하는 게 프루스트적이라면, 미래시란 이미 알려진 하나의 시간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베르그손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전자가 모종의 예언처럼 여겨진다면 후자는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있고, 또 그게 미래에서도 이어지기를 요구한다. 즉, 미래의 환영에서 내가 어떤 방식으로 주위와 관계를 맺고 또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 그 가운데 우뚝 서 있을 수 있는지를 따져 묻게 된다. 요컨대 <듄>의 모래사막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건 바로 이러한 무의식의 사막, 실재이다. 그리고 스파이스란 그런 무의식을 세계와 맵핑하도록 도와주는 매개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을 넘어가는 하나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