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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16. 2021

책임을 지는 이들에겐 기본적으로 ‘힘’이 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렌할)의 제보로 인해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피터 파커(톰 홀랜드)는 스파이디와 피터, 환대와 냉대 사이를 가로지르게 된다. 자신 때문에 친구들까지 피해를 보는 처지가 되자 끝내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회심의 한마디를 건넨다. “세상이 저를 스파이더맨이라는 걸 잊게 해주세요.” 그러자 스트레인지는 “그래. 여태까지 알게 되어 즐거웠다.”고 말하고, 이에 질겁한 피터는 몇 명쯤은 남겨둬도 괜찮지 않겠냐고 말한다. 피터의 이 질문에 스트레인지는 약간은 싫증 난 듯, 하지만 어느 정도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다. “네가 두 개의 삶을 살려는 게 문제야.” 


<노 웨이 홈>(2021)이라는 영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스트레인지의 말로 이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웅에게도 소시민의 삶이 있고, 소시민에게도 영웅의 삶이 있다는 말. 피터의 고민은 주로 후자에 가깝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히어로 영화’들은 대개 전자에 가깝다. 슈퍼맨의 인간적 면모를 그려낸 가장 최근 자의 <맨 오브 스틸>(2013)이나 울버린의 인간적 은퇴를 다루었던 <로건>(2017)을 떠올려보자. 이런 영화들이 노리는 건, 이들 세계에 영웅이라는 ‘큰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라, 소시민 혹은 인간이라는 ‘작은 이야기’도 있다는 점을 설파하는 일이다. 


이들은 큰 이야기에 가려진 작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으면서 큰 이야기에 위협당하는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는) 작은 이야기의 면모를 보여준다. 서사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캐릭터에 입체감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이는 히어로 영화의 모자란 면을 채워주는 단짝과도 같다. 하지만 스트레인지의 생각은 조금 달라 보인다. 스트레인지는 작은 것이면 작은 것, 큰 것이면 큰 것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둘 중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에는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에 속박된 채로 살아야만 함을 지적한다. 친절한 이웃인 ‘스파이디’가 현실에서는 가난에 찌든 피터 파커인 것처럼, 인간 피터는 영웅 스파이더맨의 그늘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늘은 태양이 있을 때만 지상에 드리운다. 말하자면, 어둠은 빛이 있을 때만 비로소 존재한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교훈과 스트레인지가 피터에게 전하려는 게 그러하다. 영웅이 전면으로 드러날 때, 그 안의 인간은 영웅의 이미지에 종속되고야 만다는 점. 피터가 스트레인지를 찾아갔을 때 소소하게 주고받는 호칭 관련 농담은 이런 주제를 간접적으로 보조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와의 만담은 단순히 친근감의 표현으로만 볼 게 아니라, ‘친근한 이웃’이라는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의 구호가 어떤 방식으로 작품 내의 인물 관계에 응용되었는지를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만약 자신이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 그러니까 인간 피터 파커에 불과했다면 지금의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세상이 자신을 잊게 해달라고 말하는 피터가 “MJ는 빼주세요.”라고 말하면서 했던 고민이 그렇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이 자신을 잊었을 때 이전에 알던 이들과 다시금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점에 호감을 느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피터의 이 고민은 영웅 이미지에 속박된 자신의 처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어벤져스에 가입하게 된 그의 고민은 영웅으로서의 힘이 인간으로서의 성장보다 먼저 이루어졌다는 점, 즉 몸만 커져 버린 채로 덩그러니 남은 어린 자신에 대한 고민이다. 


그래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이 스파이더맨 프랜차이즈의 유서 깊은 문장임을 이미 알고 있다면, <노 웨이 홈>의 이야기가 다른 스파이더맨 영화와 어떤 면에서 차별화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우리가 위에서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설명했던 대목을 상기해보자. 만약 큰 힘에서 큰 책임이 비롯된다면, 정반대의 생각도 가능하다. 큰 책임은 어디까지나 큰 힘이 있어야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늘의 시원함이 많고 높은 날씨에 비례하듯, 책임을 지는 일은 우리에게 힘이 있음을 말해준다. 즉 힘이 있기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지는 이들에겐 기본적으로 ‘힘’이라는 기본 소양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힘에 혼란스러워하는 기존 스파이더맨들의 고민과는 달리, MCU의 피터만이 갖는 고유의 특성이다. 


역사상 가장 어린 스파이더맨(‘영화’ 중에서는 말이다)의 인 톰 홀랜드는 자신의 미숙함을 몸이 아닌 마음의 문제로 돌려야만 한다. 섬세한 지적이 될 수는 없겠지만, 아직 대학에 갈 나이가 않은 피터의 나이는 아직 본격적인 세상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피터는 소코비아 협정과 같은 정치적인 사안에 뛰어들 수 없고, 실제로 그럴만한 능력이 없기도 하다. 스트레인지나 스타크가 줄곧 말하듯, 피터는 그저 어린아이에만 불과했고 하지만 그에 비하면 너무 큰 것들을 짊어지려 했다. 바로 이 점에서 MCU의 젊은 스파이디는 오히려 더욱 정치적이거나 동시대적으로 보이는 면이 있다. 이전의 ‘피터’들이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걸 외부 세계에서 발견했다면, MCU의 피터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게 내면세계에 있음을 믿어야만 한다. 즉 그가 싸워야 하는 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허구와 환상이다. 


<노 웨이 홈>의 전작인 <파 프롬 홈>에서 미스테리오가 피터에게 남긴 상처는 허구와 환상이었다. 미스테리오가 사용하는, 모든 것이 근사하게 보여지는 과학의 세계는 마법과 한 끗 차이밖에 나지 않지만 그 본질은 심각할 정도로 엇나가고 뒤틀려 있다(본래는 심리치료를 목적으로 발명된 기술이 상처받은 세계를 치유하게 된다면, 그때도 이걸 허구라고 볼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같은 목적을 이루는 두 개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평행우주처럼 보일 지경이다. 헌데 그렇다면, 닥터 스트레인지의 타임스톤과 행크 핌의 핌 입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이를 설명하는 건 간단하다. 타임스톤은 역사를 바꾸지 않았지만 핌 입자는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역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던 것들은 이제 더는 허구나 환상이 아니었다.


스타크의 살인 드론을 사용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된 피터에게 허구와 환상은 아마도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다. 이전의 두 피터에게 허구와 환상이 일종의 이데올로기였다면, MCU의 피터에게 허구와 환상은 평행하고 다중화하는 세계의 법칙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 현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닐 때, 한 가지 사건에 대한 의견이 하나의 공식으로만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곤 한다. 어떤 곳에서는 만고불변의 진리였던 게 다른 곳에서는 검증할 가치조차 없는 허섭스레기다. 허나 평행우주가 있는 것만 같은 이 모습들에서도 그들만의 법칙은 있기 마련이다. 이 법칙이 다르기에 그들 간에는 불화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안에서 허구와 환상을 하나로 뭉쳐주는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다소 고민되는 대목이 여기에 있다. 그런 구심점이라도 우리를 만족시켜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에 순순히 응해야만 하는 것인지와 같은 문제. 자기만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계에서 자기만의 현실과 기준을 세우고 그에 위안받는 일은 누군가의 ‘세계’를 구할 수 있다. 큰 이야기는 붕괴할지도 모르지만 작은 이야기는 살아남으며, 큰 세상이 어떻게 되든 간에 작은 나 자신을 살아남게 하고 싶다, 는 생존의 논리 말이다. 이쯤 되면 허구와 환상은 단순히 이름 그대로만은 아니게 된다. 또한 미스테리오가 어벤져스 붕괴 이후의 세계를 현혹한 이 방식은 사실 ‘우주의 절반이 사라진’ 사태가 흩고 지나간 이후의 혼란기, 즉 ‘작은 이야기 전성시대’를 간접적으로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 아니면 내가 사라진다는 50:50의 타노스 사건은 어떤 점에서 가장 간소하고 간편한 해결책이었다. 이른바 오컴의 면도날이라 할 수 있을 이 해결책이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것은 큰 이야기의 거세와 작은 이야기의 부각이었다. 큰 이야기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남은 생존자들은 작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뭉쳤었고, 하지만 5년 뒤에 사라졌던 이들이 다시금 돌아오면서 그 작은 이야기는 다시금 위기에 빠졌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공개된 <호크아이> 드라마는 “차라리 타노스가 옳았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나돌고 있는 세상을 보여준다. 큰 것과 작은 것 사이의 대결 구도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작은 것의 적이 곧 작은 것이 된다. 더는 오컴의 면도날이 통하지 않으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복잡해지기만 하는 이 문제 앞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건 결국 세상을 생각하기보다 자기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니 데일리 뷰글이 사람들 사이에 전파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가짜 뉴스가 아니라 허구와 환상일 수도 있다. 비록 자신의 욕심을 채울 요령이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미스테리오가 사람들 사이에 심어주었던 그 허구와 환상 말이다. 바꾸어 말해 톰 홀랜드의 피터가 마주한 세계는 영웅이라는 큰 이야기가 여러 평행우주로 갈기갈기 찢겨나가 버린 슬픔과 종말의 세계다. 예를 들어 영화의 후반부에 벌어진 모종의 불행에서 스트레인지는 이렇게 말한다. 자유의 여신상 위에서: “’네’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몰려오는 거야.” 이 말은 피터 하나만 사라지면 모든 사건이 마무리될 것이라는 달콤한 해결책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쓴 내 나는 소리다. 큰 이야기를 꿈꾸는 소년에게, 큰 이야기만 포기하면 작은 이야기가 지켜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일은 그가 MJ와 네드를 포함한 모든 이로부터 잊힌다는 사실에 의해 하나의 아이러니가 된다. 스트레인지가 말하던 두 개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법칙은, 영웅이 되고 싶었던 소년이 영웅이 될 수 없는 세계로 내동댕이쳐지는 아이러니함으로 변질되고야 만다. 


자신이 스파이더맨인 것을 잊어 달라고 말하는 한 소년의 바람이 하나의 역설이 되어 세계의 지축을 흔든다. 세상은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는 곳으로 변했지만, 자기가 영웅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특히나 이 문제는 벌써 수십 년이 된 세르주 다네의 글에서 그가 초개인화라고 말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다네는 큰 이야기를 마치 작은 이야기의 성공적인 경우로 포장하는 일을 통해 개개인에게 주어진 작은 이야기를 큰 이야기에 곧바로 대입해버리는 일을 경계했다. 소년 피터가 자신을 대입하려 했던 세계는 이미 무너졌고, 그 자리엔 부서진 면도날만이 남았다. 허구와 환상으로 가득 찬 세계를 가로지르는 것에 실패한 피터는 오히려 그 자신이 허구와 환상이 되고야 말았다. 헌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정반대의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허구와 환상을 가로지르는 게 아니라, 허구와 환상으로 가로지르는 일 말이다. 


우리가 알아 왔던 소시민적인 영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 ‘세계(universe)’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곳은 멀티버스이므로 일말의 희망을 기대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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