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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7. 2021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우리

<매트릭스: 리저렉션>(2021)









<매트릭스4>는 기존 작품의 후속작이지만 이전 작품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이 작품이 갖는 위상학적 지위를 논하기 위함이다. 첫 번째 사실은 이 작품이 <매트릭스3>의 2003년에서 18년이 지나서 나왔다는 점이다. ‘트릴로지’라는 말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4’라는 선택은 아무쪼록 의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런 의아함을 상쇄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추측이 가능하며,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의아함을 덮는 의아함’이다. <매트릭스>의 3편이 두루뭉술하게 끝나버렸으므로 이 헛된 마무리에 결실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4편은 관에 누운 시체를 부관참시하는 게 아니라 21년의 의아함이 03년의 의아함을 이겼을 때 그런 의문에 답할 요령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이 의문이 꼭 해소되었어야 했는지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관객의 요구가 아니라 감독 본인의 개인적 취향을 따라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서 언급되듯 “사랑은 모든 것의 근원이다.”라는 말 한마디가 영화 전체의 하이 콘셉트다. 다른 한편, 전작의 마지막에 나란히 사망한 트리니티와 네오를 기계 왕국(0/1)으로 데려오면서까지 살려내야 했던 이유는, 후속작의 가능성을 열어둔 다른 매체 속의 <매트릭스>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트리니티와 네오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반대로 말해 이 영화엔 두 사람의 사랑 말고는 볼거리가 없으며, 다시금 반대로 말하자면 (워쇼스키는) <매트릭스> 시리즈가 엉성한 철학 교과서이기보단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읽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그러한 맥락의 연장선에서 해보게 되는 질문은 감독은 과연 사랑을 무어라 생각하는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질문은 얼추 몸의 문제로 연결되는데, 이는 4편의 초반부에 던져지는 물음과 영화 외적인 감독의 행보를 떠올려보면 그렇다. 먼저 영화 외적인 행보는 많은 이들이 이미 잘 알고 있다. 워쇼스키는 형제에서 남매가 되었고, 다시금 자매가 되었다.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결론적으로 그들은 몸의 변화를 겪었고 이는 그들의 가치관에 변화를 불러왔을 것이다. 몸은 영혼을 운반하는 하나의 운송수단에 불과하다는 점, 즉 몸이라는 건 영혼의 드러냄이자 인식표일 뿐 그 자체로 생명인 것은 아니다. 물론 여기서 내가 몸의 변화를 통해 지적하려는 건 남성/여성이라는 편리한 이분법은 아니다. 이러한 전환이 어쩌면 ‘트랜스’한 것, 즉 가라타니 고진 식의 트랜스 크리틱이 될 수는 없을지 궁금해졌다.



세간에 고진이 말하는 트랜스크리틱은 ‘기존의 이론적 지형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입장인 A와 B를 마주 세움으로써 이 둘의 대립을 통해 양자의 모순점을 서로의 결점을 겨누는 칼날로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칸트와 마르크스를). 철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심도 있는 논의가 불가능하지만, 이 4편은 전반적으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비평으로 읽히는 감이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후반부에 트리니티와 네오가 점프를 하는 장면을 살펴보자. 러닝타임의 초기부터 줄곧 공중 부양을 염원하던 네오였지만 끝내 네오의 능력은 돌아오지 않는다(네오의 힘이 사라진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네오가 아닌 트리니티가 각성하여 공중에 뜰 수 있게 된다. 영화의 결말로 가면 네오에게도 공중 부양 능력은 돌아오지만, 우리가 4편에서 얻은 결실은 트리니티의 각성이다. 예전에 트리니티가 네오의 옆자리에 앉아 그를 보조하는 역할이었다면, 4편에서 트리니티는 네오와 동등한 존재로 표현된다. 마치 페미니즘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맥락은 ‘워쇼스키’의 새로운 선택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1편과 3편에서 스미스와 네오의 관계를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매트릭스의 관리자인 아키텍처가 말하길, 이 둘은 일종의 반대 관계여서 하나가 세지면 다른 하나도 덩달아 강해진다. 그리고 서로 반대되는 이 두 사람이 하나로 합일됨으로써 폭발하는 게 3편의 결말이었다.



허나 그레마스에 따르면 네오와 스미스는 모순된다기보다 반대되는 쪽에 가깝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결여된 것을 두고 다투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대립한다.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오히려 트리니티와 네오의 관계가 바로 모순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결여된 것을 잘 알았기에 오히려 더 끌리는 존재가 되었다. 그레마스의 기호 모델에서 반대 관계가 양옆으로 화살표 쳐지는 반면, 모순 관계는 대각선 형태를 그리므로 모양새로도 이쪽이 더 옳아 보인다. 횡단이라는 말에서 횡이라는 한자가 가로지를 횡(橫)으로 읽힌다는 점을 보면 알겠지만, 결국 <매트릭스> 시리즈를 관통하여 줄곧 이어 나갈 방법론은 트리니티와 네오를 트랜스크리틱하는 것이었다. 3편에서 두 사람이 사망에 이르러야 했던 건 그 때문이었을 테고 말이다.



따라서 4편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물건이라기보다는 이전부터 기획되었던 것일 공산이 크다. 이전의 트릴로지가 네오와 스미스의 반대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아마도 4편은 트리니티와 네오의 모순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게 새로운 트릴로지의 탄생인지 아니면 그저 아쉬움을 달랠 뿐인 방점인지에 관해서는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알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만을 논해보도록 하자. 위에서 말했듯이 <매트릭스> 시리즈는 몸에 관한 영화이기도 한데, 이러한 사실은 매트릭스 안의 요원들이 인간의 몸에 데이터를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등장해왔다는 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어딘가에 업로드되고 동기화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철학 서적 한 권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4편에서 되풀이되는 공중 부양 장면으로, 고지식한 와이어액션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네오를 마치 신화 속의 전령 헤르메스처럼 보이게 한다.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였고 사람들은 그가 전해주는 말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령은 신은 아니지만 신의 대리인이라 볼 수 있고 그래서 굉장히 모호한 처지에 놓인다. 이를테면, 대통령 권한 대행이 잘못을 저지른다면 책임져야 하는 건 어느 쪽일까. 자신의 권한을 위임한 대통령인가 아니면 직접 실무를 수행한 권한 대행인가. 이러한 괴리에서 몸의 문제가 생겨나고 이는 기본적으로 매트릭스가 던지는 철학 문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피어스는 묻는다. 네오가 정말로 ‘The One’일까? 그는 예언을 따라 나타난 신인가 아니면 그러한 예언을 대행하는 헤르메스인가. 이 물음은 근본적으로 몸과 정신이 분리된 매트릭스 안에서 비롯된다. 이곳이 매트릭스라는 점을 아는 이들에게 그곳은 여전한 현실이다. 반면 이곳이 매트릭스라는 걸 아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 밖에 진짜 몸이 있고, 그 몸을 통해 이곳에 접속해 있을 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지금-여기’는 그들이 보는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마치 매트릭스 세계가 소스 코드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요원들의 글리치(glitch)처럼, 그들에게 현실은 일종의 잔영처럼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4편에서 전임자 아키텍처를 대신하는 새 관리자 ’애널리스트’가 등장하는데, 그의 능력은 시간을 느리게 파악하여 그 안에서 움직이는 불릿 타임(bullet time)이다. 기본적으로 매트릭스 안에서 글리치는 보이는 것과 표현되는 것의 불일치를 의미하고, 이 점이 워쇼스키의 성 정체성처럼 몸과 정신의 괴리를 물리적으로 구현해내는 장치였다면, 불릿 타임은 그러한 단절과 불연속의 가치가 끊임없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에서 하나의 연속성을 확보한다. 이는 4편에서 애널리스트에 의해 불릿 타임이 실행될 때 네오를 포함한 세계가 느릿하게 나아가는 한편, 그 안에서 독립적인 변수로 작동하는 애널리스트가 세계에 간섭하는 방식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 모든 변화가 우리가 그러한 매트릭스에 익숙해진 세상을 따라 이루어졌다.



1편이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에게 사이버스페이스는 여전히 미지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4편은 사이버스페이스가 너무나 보편화한 2021년에 나왔고 매트릭스라는 영화조차 고전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전처럼 ‘매트릭스’를 새로운 공간으로 내세울 수는 없었고, 스마트폰과 상시 떨어질 일 없는 세상에서 두 공간을 분리해 생각해보는 일도 어려웠다. 우리 시대는 요원들을 덮어씌우는 곳이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공유받아 그에 몸을 의탁하는 곳이고 의식은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 장 뤽 낭시가 몸에 대해 말하듯, 4편에서의 몸은 세계를 향해 의식을 내보이는 곳임과 동시에 그런 세계가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쪽으로 열려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열림과 닫힘의 공존 상황은 기본적으로 단절을 강요하지 않는 바, 반대가 아니라 모순 관계를 지시한다.



4편에서 일반 프로그램으로 강등된 스미스와 네오가 서로에게 협력의 여지를 열어둔 것, 시온이라는 인간들의 도시가 아이오(I/O)라는 세계의 피난처로 변화한 것도 이러한 트랜스크리틱의 징조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궁금해지는 건 그렇게 열림과 닫힘이 공존하는 통로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다. 만약 모순이라는 말이 공존의 논리를 따른다면 열려있으면서도 닫혀있는 건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매트릭스4>에는 분명하게 여길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0과1로서든 아니면 남자와 여자든 간에, 이분법이 심해지는 이 세상에서 반대를 모순으로 바꾸는 일은 우리가 다시금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인 듯하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모순적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사랑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 존재의 근원이 모순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절대'란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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