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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차미 Dec 20. 2022

프레임이라는 물적 분열이 드러내는 것

<아바타: 물의 길>(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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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물의 길>에 관해 우리가 언급해야 할 한 가지 지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영화의 기술적인 측면이다. 영화에는 종종 24프레임의 2배인 48프레임으로 재생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보다 보면 두 프레임 간의 전환이 그리 매끄럽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내러티브가 아니라 기술적인 면에서 그렇다는 소리다.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프레임을 유지하면 눈이 적응할지도 모르겠지만 비용상의 문제로 유지될 수 없는 48프레임은 24프레임과의 전환에서 툭툭 끊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면 <물의 길>이 고프레임을 적용하면서까지 얻으려 한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 부분, 아바타 1편에서 보여준 게 3D 상영 기술이었다면 2편에서는 영화에서의 고프레임 적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물론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엿볼 수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이런 이야기는 그리 특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제작하는 기술은 많은 경우 영화 외적인 이야기로 치부되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영화와 게임 간의 차이에서 그래픽 기술의 재현을 논하는 몇몇 담론이나 영화에서 24프레임에 관한 고정관념이 있는 걸 고려하면 무엇이 영화적인지를 논하는 것에 이 문제가 뛰어드는 이유란 충분해 보인다. 


촬영기술이 아니라 제작 측면에서 HFR(High Frame Rate)이 적용된 영화로는 2012년의 <호빗> 시리즈가 선례로 있다. 그 외에 이안 감독의 <빌리 린스 롱 하프타임 워크>(2016)가 120프레임 카메라로 실사 촬영했고 이후로는 <물의 길>이 자리한다. 영화사 책을 뒤적거리면 24프레임이 영화에 관한 표준으로 자리한 가운데, 이 영화에 적용된 기술은 영화라는 매체에 관해 던져지는 분분한 논쟁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가 <물의 길>에서 살펴보아야 할 건 영화의 내적 소재가 기술과 결합하는 모습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프레임 기술이 주로 애니메이션에 적용된다는 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는 애니메이션의 운동성이 애초에 현실과는 벗어나 있고 따라서 운동성=현실성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 상황에서 더 부드러운 것에 대한 욕망이 세밀함과 동등 혹은 등치되는 덕분이다. 정지된 것을 움직이게끔 하는 애니메이팅 기술에서 더 부드럽게 움직이는 일은 그만한 창조기술의 발달에 비견되므로, 인간이 신에 가까워지려는 이상 이 세밀함은 필수적으로 요구되어야만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등장한 프레임 보간은 본래 24프레임으로 제작된 영상을 마치 더 높은 프레임인 것처럼 재생하는 기술인데, 드미트리 렌더(DmitriRender)처럼 소프트웨어로 구현하는 방식이 있고 플루이드 모션처럼 특정 제조사의 하드웨어가 구현하는 방식이 있다. 이 기술은 영상을 더 부드럽게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데 그 이유는 단연 생동감 때문이다. 툭툭 끊기는 프레임은 그 면이 세계에 드러나는 과정에서의 돌출을 암시하며, 이는 곧 충돌의 가능성이 높아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고프레임에 관한 욕망은 우리가 그 세계에 얼마나 잘 섞여들어 가는지에 있는지라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기술의 핵심은 최적화와 효율에 있다. 본래 없던 것을 만들어 넣는 일을 응용하면, 더 낮은 해상도로 다운 스케일링하면서 이를 통해 절감된 자원으로 더 높은 해상도와 프레임인 것마냥 보여주는 최적화가 가능하다. 표기에 들어가는 자원이 절감되고, AI가 다운 스케일링 과정에서 잃어버린 화소를 보간하는 작업은 절감된 자원에 훨씬 못 미치는 자원을 요구함으로써 작업은 최적의 효율을 얻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과연 표준적인 화소를 요구하느냐는 점이다. 만약 영화의 목적이 생생함을 전달하는 것에 있다면, 현실에 가까운 영상을 구현하려는 일은 고화소와 고프레임을 구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영화에 요구하는 것은 고화소와 고프레임 같은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그 연출이나 편집과 같은 내적 가치이다. 고해상도의 경우는 LASER 상영 기기와 같은 도입에서도 그 효용이 증명되지만, 오히려 우리는 영화가 고프레임으로 상영되거나 하면 현실성을 잃으며 더 나아가선 구역질이 날 수도 있다(3D 멀미라 불리는 현상). 따라서 <물의 길>이 자신의 액션을 보여줄 요령으로 택한 48프레임은 나름의 승부수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건대 우리는 이러한 선택이 단순한 기술적인 과시에만 미칠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를 보여주기에 최적화된 방식인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프레임 보간 기술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 제시한 효율은 영화가 현실성을 절감하면서 영화적인 것을 내보이는 방식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더 세부적인 논의를 위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아니라 애니메이팅 기법이라는 물성을 전제로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자.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의 애니메이팅이란 현실의 속도와 동기화되지 않는 물성의 출현으로 정의해볼 수 있다. 이른바, 무엇이 애니메이션인가에 관한 물음은 그 속력의 다름에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속도 차를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 <물의 길>의 도입부에 자리한 대열차 강도라고 생각한다. 1편의 연장선에서 인디언-아메리칸이라는 대립구도를 암시하는 이 장면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끌어가는 대전제가 됨과 동시에 양쪽 진영에 속도 차가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나비족의 평균속도가 탈것의 속도라면 인간의 속력은 우주선이나 열차와 같은 기계의 속도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이는 둘 사이의 문명적 발전의 차이를 드러낸다. 더 나아가 이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방식에서의 차이를 묘사하는 것이기도 한데, <물의 길>을 구성하는 문장이 “물은 모든 것을 연결한다”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 자연의 삶에서 속력은 느리더라도 단절되지는 않는 순환을 구성한다. 즉 물의 길은 애니메이팅 기법이다. 


<물의 길>에서 CG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을 장면 중에 많은 부분은 물과 관련 있다. 머리카락이나 광원 등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묘사하기 어려운 것으로 꼽히는 유체는 <물의 길> 전역에 퍼져있으며, 이를 통해 <물의 길>이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를 간접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허나 무엇보다 이 유체는 그들의 말처럼 “모든 것을 연결”하는데, 이는 애니메이션의 유동성이 영화에서 현실성과 연결되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여기서 자연/물/유동성-문명/기계/현실성이라는 이분법에 반대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대립구도는 무엇보다도 편리함을 위해 설정되었다기보단 영화가 내적으로 드러내는 가치이다. 그레이스 어거스틴 박사의 딸 키리(둘다 시고니 위버가 연기한)나 스파이더(잭 챔피언)처럼 나비족이면서 인간의 모습에 가깝거나 혹은 인간이면서 나비족의 문명에 가까운 인물을 내세우며 영화가 얻는 것은 말 그대로의 아바타, 존재와 역할 간의 분리이다. 바꾸어 말해 <물의 길>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건, 유동적이라 해서 현실적이지 않은 게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다시금 48프레임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부드러움에 가까워지려는 이 유동성의 욕구는 어떤 면에서 보다 자연친화적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점점 빨라지며 즉각에 근접하는 속도의 시대에서 고프레임의 가치는 단순한 부드러움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프레임을 극도로 세분화하면 목적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오히려 그만큼 더 늘어나므로 이는 한정된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게 된다는 불릿 타임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불릿 타임에서 중요한 건 근본적인 시간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세계에 관한 탐험 가능성이 늘어난다는 위상학의 발달이다. 말하자면 <아바타>의 고프레임은 세계에 관한 탐험 가능성의 증가이자 단순히 이분법으로 제안된 세계에 위상학적 지표를 넓혀주는 하나의 영화적 기법이다. 영화의 상영시간이 아무리 늘어난다 한들 물리적인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이야기의 함량과 세계를 넓힐 방법은 그 내적 세계를 분열하여 나열하는 방법밖엔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서로 다른 개체에 존재를 넓힐 방법이란 외적 교류가 아니라 그 내적 세계를 분열하는 것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 


고프레임 애니메이팅 영상을 두고서 게임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연상한다면 우리는 게임과 영화의 스침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겠지만,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빠른 것들을 두고 사용한다고 해서 매체의 가치를 잃는지를 물었을 때 다시금 영화에 관한 것으로 번질 수 있다. 영화는 24프레임을 넘어가는 순간 영화의 가치를 잃게 되는 걸까? 24프레임이 영화의 표준으로 제안된 상황에서 이때의 현실성은 영화의 물성에 관한 것이지 존재의 본성에 관한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오히려 존재는 분열을 통해 의식에 드러나는 것이므로 실존은 분열 이전에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프레임이라는 물적 분열이 드러내는 건 허위 세계의 매끈한 봉합이 아니라 더 많은 접근 기회일 수도 있다. 이 경우 프레임 보간은 가치의 2배 증가가 아니라 세계의 2배 분열이다. 마찬가지로 <물의 길>은 아바타라는 DNA 조합체를 통해 나비족과 인간 사이의 전송을 묘사한다. 이를 따르자면 영화가 묘사하는 건 인디언과 서부개척이라는 시대에서 모티브를 얻지만 이것이 추동하는 건 존재 자체에 관한 연결과 그 사이의 연결고리다. 


슬로우 시네마가 보여주는 것은 영화의 시간을 무한대로 늘리면 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 신념이다. 그리고 이 반대편에는 같은 신념을 다른 방법으로 응용하는 프레임 보간이 있다. 프레임을 무한히 늘리면 점진적으로 점-선-면에 가까워진다고 말하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하학이 한편에 자리한다면, 그렇게 연장된 프레임이 둘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가치가 침투할 만한 자리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연결성이 극대화된다는 반대편이 있다. 슬로우 시네마가 현실에서 잃어버린 조각을 영화에 채워넣으려 했다면 이것은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하는 프레임의 인위적 형성과 그 목적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조각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 신념은 그 잃어버린 연결(Missing Link)을 통해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 보려는 모험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물의 길>에서의 연결은 모두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화해의 길, 무언가를 확립하고 포착하는 프레이밍에서 벗어나 그 바깥 세계를 보간하는 방식으로 내부를 결속하는 한 가지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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