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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수달 Nov 05. 2023

다시 걷는 길

26일차, 레온에서 비야당고스델파라모


레온에서의 재활을 마치고 다시 걸어보기로 했다. 목적지를 정해놔야 짐을 부칠 수 있는데 오늘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다리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배낭을 등에 매고 출발해야 한다. 며칠간의 휴식 이후 처음 걷는 날이니까 무리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출발하는 아침이 새삼 조금 낯설다. 걸어 보고 안되겠다 싶으면 아스토르가로 점프해야지.


과연 잘 걸어질까 걱정했는데 조금 가다 보니 의외로 꽤 무난히 걸어지네? 근 몇 주간 매일 걸어 왔던 몸은 조건반사적으로 잘 걸어댔다. 아직 아팠던 발목이 약간 덜 부드럽긴 했지만 나머지 부위들은 며칠간 아주 잘 쉬었는지 매우 잘 돌아간다. 역시 사람은 하던 것을 해야하는 것인가?

레온 시내에서 출발해 외곽으로 향했다.



대도시를 빠져나가는 건 언제나 그렇듯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복잡한 도심에서 화살표 찾기도 수월치가 않고 변두리의 풍광도 그냥 그렇다. 그래도 오늘은 도시를 빠져나오는 길에 비교적 무난한 주택가 풍경이 많아 그럭저럭 무난하다. 다만 언제부턴가 도무지 노랑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는게 작은 문제였지만.

길을 살짝 잘못 잡았든지 아니면 아직 복잡한 도시 외곽 구간이라 화살표가 눈에 잘 안띄는 것일 수도 있다. 블록마다 살피며 화살표를 찾는 건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아예 구글맵을 보고 레온을 빠져나가면 루트상 지나가게 된다는 성당을 찍어서 가기로 했다. 그 지점 쯤 가면 한적한 길에서 화살표가 잘 보이겠지.


외국인 순례객 두명이 나와 비슷한 방향으로 오고 있다. 오늘 막 레온에서 출발했는지 신발이 상당히 깨끗하고 표정이 발랄 청순하다. 그들도 길을 잘 모르는 듯한 눈치인데 뭐 알아서 찾아 오겠거니 하면서 한 15분 정도를 엇비슷한 코스로 걸어오던 시점, 앞에 갈림길이 나왔다.


외국인 순례자는 자신있게 왼쪽 방향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나한테도 오라고 손짓하는데 나의 구글맵은 오른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레온 뉴비와 구글맵 중 나는 단연 진리의 구글맵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고, 나도 길을 정확히 모르는 터라 그들에게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뭐 구글맵대로 가면 순례길 경로상에 있는 성당은 무조건 가게 되어있으니 그냥 카미노 공식 루트건 아니건 가던 대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갑자기 눈앞에 화살표가 나타나네? 걷던 길은 카미노 길이 맞는 것이었다.


오오 역시 진리의 세인트 구글!

애송이들 순례자는 함부로 길을 아는 척 하지 않는단다.

이제 대충 가도 몸이 카미노로 이끄는군.



이후 얼마 안되어 그 성당에 도착했다. Basílica de la Virgen del Camino 라는 이름의 이곳은 16세기 성모의 기적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성당 자체는 새로 지어진 현대식 성당이었다.

모던하고 소박한듯 굉장히 절제된듯한 아름다움이 있는 멋진 성당. 순례길에서 마주치는 웬만한 오래된 성당들보다도 더 밀도있도 정제된 종교적인 감흥을 주는 예술적인 공간이었다. 아 여기서 도장을 꼭 찍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성당 곳곳을 둘러 봐도 도장은 찾을 수가 없었다.



성당을 지나면 두갈래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원래 카미노길이고 하나는 대체 루트다. 난 원래의 길을 선택했는데 대부분 찻길 옆의 흙길이고 다소 단조로운 코스였지만 대체 루트에 비해 조금 더 짧다. 오늘은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조금이라도 쉬운 길을 택하는게 맞겠지.



아침에 늦으막히 출발해선가 걷다 보니 어느새 2시가 넘어버렸다. 많이 걸은 건 아니지만 아팠던 발의 피로도도 상당하다. 마침 마주친 작은 마을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수도 있는 카미노 위의 작은 마을에는 공립 알베르게가 하나 있었다. 


공립 알베르게는 기부제로 운영되는데 리뉴얼이 되었는지 시설도 상당히 깔끔하고 주방 사용도 자유로웠다. 단 2층 침대에 안전바가 없는건 함정이다. 체크인하고 적당히 기부도 드리고 자원봉사자 분께 세탁기에 유료 빨래도 부탁드렸다. 세상에 나중에 건조까지 끝난 빨래를 다 개어서 자리로 가져다 주셨다. 빤스까지 있었는데... (보통은 빨래가 끝나면 건조기에서 알아서 가져가라고 하시거나 건조기 앞 바구니 같은데 쌓아놓는다) 감사하고도 민망하였다.



소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레온에서 자주 마주쳤던 대구 남매분들이 이미 와 계셨고, 부산의 이선생님도 잠시 후에 도착하셨다. 거의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는 순례길에서 처음 뵙는 한국 분도 도착하셨다. 저녁에는 모처럼 한국 사람들끼리 다같이 바로 앞 식당에 가서는 11유로짜리 오늘의 메뉴를 사먹었다.


밥먹으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오늘 처음 뵙는 한국 분은 40km를 걸어오셨다고 한다. 오늘 아침 레온 전전 마을 쯤에서 출발해서 레온을 지나서 여기까지 오셨다고 한다. 시작은 로그로뇨에서 하셨다는데 총 열흘 쯤 걸리셨다나. 거의 매일 40km 가까이 걷는 엄청난 속도로 오고 계시다고 한다.


아니 어떻게 매일 사십키로를 걸어요?

일찍 출발해서 늦게까지 걸으면 되요 허허허 빠른게 아니라 오래 걷는거에요.

레온에서는 쉬시지도 않구요?

대도시는 복잡해서 얼른 지나치고 싶더라구요.


이야기하다 보니 나보다 최소 열살 이상은 많으신 형님인데, 보통 내공이 아니다. 어떻게 저리 잘 걸으시지? 부르고스 전후로 욕심 내서 며칠 25~30킬로 씩 걷다가 다리에 탈이 난 내 입장에서는 신기하기도 하고 샘도 좀 나고 약간 자극이 되는 것도 같다.


내일 아침에 동키로 배낭 보낼 장소를 알베르게 관리자분께 여쭤보고, 이선생님께도 동키 장소 말씀해 드리면서 하루가 저물었다. 누구나 각자의 카미노가 있으니 욕심은 내지 말아야지. 그래도 이만하면 아프고 난 뒤 치고는 괜찮다. 다시 걸을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지.


10월 13일 목요일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오늘 걸은 길 약 21km

지금까지 온 거리 약 500km

산티아고까지 남은 길 약 29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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