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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수달 Nov 08. 2023

의욕을 되찾은 순례자의 불타는 하루 1부

27일차, 비야당고스델파라모에서 아스토르가


05:30

자꾸 불이 켜졌다 꺼졌다 알베르게가 부산스럽다. 누가 이렇게 부지런한거야 핸폰을 보니 아직 6시도 안되었다. 다시 눈좀 붙여야지.


06:30

이제 일어나야지. 사람들이 엄청 부산스럽다. 서울스럽지 않아서 다행이다. 역시 부산은 갈매기와 돼지국밥. 국밥 먹고싶다.

일어나서 아침을 챙겨먹었다. 어제 묵은 이 기부제 알베르게의 자원봉사자분들이 아침일찍 소박하지만 소중한 아침을 준비해 놓으셨다. 카미노에서 이런 연대의 마음은 참 고맙고 힘이 된다. 어제 세탁비 6유로랑 도네이션 14유로로 총 20유로를 알베르게에 보태드렸는데  쫌 더 드릴걸 그랬다. 혹시 카미노 걸으실 여러분 비야당고스 델 파라모 공립 알베르게 (Albergue Municipal de Villadangos del Páramo)는 추천입니다용. 구글 평점이 낮은 건 리모델링 전인 것 같고 지금은 깔끔하고 좋아요!



07:30

출발! 오랜만에 깜깜할 때 출발이다. 별을 보며 길을 시작하는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왜냐면 지평선에서 일출을 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두울 출발해도 지형상 가려서 없는 경우도 많고 넋놓고 걷다보면 순식간에 놓치는 경우도 많아서 실제로 제대로 건 두세 번 밖에 없는 것 같다. 오늘은 비록 광활한 지평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빨갛고 또렷한 멋진 일출이었다.



08:30

신기한 구름과 말라버렸지만 어딘가 예쁜 옥수수밭.

하지만 오늘은 내 화장실이죠.



10:00

어느새 걸은지 두시간이 지났으니 제2 아침을 먹어야 한다. 지나가다 마주친 바에서 오렌지주스에 또르띠야를 먹는다. 또르띠야는 일종의 스페인식 계란찜(?)이다. 카미노 중반까지는 아침에 바에 들를때면 허세롭게 커피에 크로와상을 즐겨먹었으나, 이제 무조건 단백질이 들어간 영양식을 먹어야 한다고 레온에서 삼겹살 구워준 공쌤에게 배웠다.



10:00 ~ 12:30

이런저런 풍경을 보며 걸어간다. 중간에 잠깐씩 쉬며 물 마시고 스트레칭도 한다. 아직까지는 길고 긴 메세타의 끝자락, 걷기 반갑지 않은 황무지 바닥길이다. 메세타는 레온에서 끝이 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오늘의 목적지 아스토르가까지라고 한다. (나는 이미 오래 전 메세타에 작별을 고했는데 아직 우린 헤어진게 아니었어!?) 그나마 이제 먼지가 풀풀 날리는 회색의 창백한 메세타는 아니고 황토빛에 나무도 많이 보이는게 반갑다.


오늘은 같은 숙소에서 출발한 이선생님과 함께 걷고 있다. 마지막 황무지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니 쓸쓸하지 않고 좋다. 지나치는 작은 마을에는 순례자들의 사진이며 각국의 지폐 등을 붙여두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세요(도장)를 찍어주는 아저씨의 쉼터도 있었다.



12:30

한참 더운 날씨에 황무지를 걷는 도중 누군가 운영하시는 사랑과 평화의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은 La Casa de los Dioses 라는 곳으로 신들의 집이라는 뜻인데 주인장이 준비해 두신 여러가지 과일 음료 간식 등을 먹으며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모두 무료이며 원하는 만큼 먹고 적절히 기부하면 된다. 황무지 끝의 반가운 오아시스같은 곳. 도장도 아주 멋지다.


잠시 쉬다보면 오늘 앞뒤로 스쳐간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게 되는데 모두 반갑다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이선생님이랑 한동안 여기 앉아서 발도 식히고 과일도 먹고 하면서 쉬면서 기운을 차렸다. 전에 로르카 근처의 쉼터도 그렇고 이런 장소를 만들고 가꾸는 사람들의 마음과 시작하게 된 동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13:00 ~ 14:30

이제 오늘 걷는 길의 거의 마지막, 가다보니 길이 공원길처럼 매끈해지고 저 앞에 도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황무지와 오지를 지나 교회탑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마을로 다 왔구나 뭔가 해냈다 싶은 마음이 든다. 이맛에 카미노 걷는건가.

하지만 저 멀리 마을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해도 거기서 한 3,4키로는 더 가야한다. 이 시점은 상당히 힘들다. 눈앞에 보이는데 한시간을 더 가야 하니... 게다가 도시 초입은 보통 길가를 걷거나 육교를 건너거나 하는등 복잡스럽다.


아무튼 적절한 시간에 오늘의 목적지 아스토르가에 도착했다. 총 28킬로의 짧지 않은 거리였는데 꽤 좋은 페이스였던 듯 하다. 함께 걸어온 이선생님도 다리가 좋지 않으셨는데 이렇게 잘 걸을 줄 몰랐다며 흡족! 이선생님은 공립 알베르게로 가시고, 나는 미리 예약해놓은 알베르게로 왔다.



14:50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가 아늑하고 좋다. 사진은 왜이리 안찍었니.

체크인을 하고 침대를 고르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맡길까 하다 좀 비싼듯 하여 빨래는 직접 하기로 했다. 오늘 입은 옷들을 바람막이만 빼고 잽싸게 손빨래를 해서 넣어놓는다.


빨래를 널려고 테라스로 가니 미국말 쓰는 친구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잠깐 앉아서 환타 마시면서 쿨한척 카미노에서 한국 사람 많이봤지? 나도 한국인인데 이렇게 많은게 신기해 뭐 그런 얘기를 나누었다. 여유있게 이야기를 나누는 척 했지만 사실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서다 보니 아스토르가는 생각보다 크고 예뻐 보였고, 유명한 가우디 건물도 있다고 들어서 얼른 마을로 나가서 밥도 사먹고 구경도 할 생각에 모처럼 의욕이 불타고 있었다.



15:30

마음이 바쁘다. 구글맵에 점찍어둔 맛집 식당이 4시까지 한다는데 빨리 가면 가까스로 주문을 할 수도 있을것 같다. 스페인의 식당은 보통 점심영업을 2시나 3시까지 한 다음에 (5시까지 하는 식당은 정말 드물고 고마운 분들) 꽤 긴 쉬는 시간을 갖고, 이후에 보통 빠르면 6시반, 일반적으로는 7시반이나 8시에 저녁식사 영업을 개시한다.

 

그래서 오늘같이 점심을 건너 뛰고 도착해 체크인하고 빨래하고 3시가 넘은 날은 식사가 애매하다고 수 있다. 보통은 간단히 바에서 샌드위치랑 맥주 등으로 때우기도 하고, 아예 오는 길에 12시 즈음에 사먹고 천천히 오기도 한다. (그래서 아까 먹은 2차 아침은 매우 필수다)


게다가 이 시간에는 엄마한테 페이스톡도 해야하는데, 엄마 건강 상 편하게 전화를 받을수 있는 시간대가 여기 시간으로 2시 이후에서 3시반정도까지밖에 없다. 그러니 보통 걷기를 마치고 도착하면 > 숙소 체크인 > 샤워 및 빨래 > 페이스톡 > 점심식사까지 매우 바쁘단 말이지. 이래서 2시 전에 숙소에 들어가야 편한데, 오늘은 30분정도가 딱 아쉬웠다.


나와서 동네를 쓱 돌아보니 역시나 도시 골목골목도 예쁘고 가우디 건물이랑 옆에 있는 성당도 너무 멋있었다. 아쉽지만 점찍어둔 맛집은 포기하고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가우디 건물과 성당 외관을 보여드렸다.



16:00

엄마와의 전화를 마치고 밥집을 찾아보려했으나 역시 4시의 스페인은 모두가 쉬는 시간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가우디 건물 구경이나 가야지.

디즈니의 성 같은 느낌이 나는 아스토르가의 주교궁 입장권을 끊었다.


(2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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