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우디가 지은 건물 주교궁을 구경하러 왔다. 이름처럼 당시 주교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건물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올 것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2층이 주교가 쓰시던 메인 공간인가보다. 2층에 있는 4개의 방들은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각각 업무실 예배당 식당과 같이 다른 쓰임새로 쓰였다고 한다.
건물 안에는 그림도 몇 점 걸려 있었다. 아침부터 여태 걷다가 밥도 못 먹고 허기가 진 채로문화재건물에 들어와 위아래로 오가며구경하고있으니 그림속 여인처럼 살짝 정신줄이 사라지는기분이다.
하지만 순례자 조각상은 지나칠 수 없지. 이제 지팡이에 호리병만 봐도 살짝 감정 이입이 될 지경이다.
동영상 해설을 해주는 공간도 있길래 앞에 나오는 못 알아듣는 영상을 보는척 하면서 의자에 앉아 잠시 쉴 겸 스트레칭도 해 주었다.
그렇게 가우디의 멋진 건물에서 밥대신 마음의 양식을 채웠다. 도장 찍는 것은 또 깜박해 버렸다.
17:30
가우디 건물 구경하고 사진 찍던 중 핸드폰 배터리가 나갔다.
숙소에 가서 보조배터리를 가져와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숙소를 가려면 핸드폰에서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 난 이 마을에 온 지 두세 시간 밖에 안되었고 심지어 숙소 이름도 구글맵에 찍어놨을 뿐 정확히 모른다. 아 핸드폰이 꺼지면 지도도 사라지고 암담해지는 거였구나!
엄청난 위기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당황하지 않으려 애를 쓰면서 마치 학창시절 시험볼 때 문제를 풀기 위해 아리까리한 기억을 최대한의 집중력으로 꺼내 보듯이, 차근차근 마을 입구에서부터 열심히 보면서 오던 아스토르가 시내의 구글맵 2D화면을 최대한 머리속에서 복기해 보았다.
이어서 한두 시간 전에 숙소에서 주교궁까지 왔던 기억의 잔상과 육감, 그리고 공감각적 심상 등을 종합하여 왠지 예감이 이끄는대로 여기가 맞다 싶은 방향과 골목으로 향했다. 이럴 때 주저하면 안된다. 다리와 눈의 직관이 이끄는 곳으로 가즈아.
그 결과는... 단 한번도 헤매지 않고 바로 숙소를 찾았다! (뭐 원래 5분 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복잡하다면 복잡한 골목이었다) 서울에서는 길치지만 여행만 나오면 생기는 길찾기 초능력은 언제나 놀라운 것 같다.
들어온 김에 배낭에 있던 비상식량 초콜렛이랑 바나나도 먹으며 허기를 좀 채우고 온김에 양말도 챙겨 신었다. 비록 걷기가 끝나면 슬리퍼떼기를 신고 다니는 비루한 순례자일지언정 성당 들어갈 때는 양말에 긴 바지 정도는 최대한 하려고 한다.
17:40
다시 숙소를 나와서 시내쪽으로 걸어와 주교궁 옆에 있던 대성당 (Catedral de Santa Maria)에 입장했다. 안내하시는 분이 엄청 친절하고 순례자 할인도 있으며 오디오 가이드 기계까지 주는데 매우 호감이다.
성당과 박물관이 함께 있었는데 오늘의 열정으로는 모두 보고 싶지만 현재 남은 HP로는 성당이 한계다. 쓱 지나치면서 성당 본관으로 직행한다.
본관 가는 통로에 걸려 있던 마귀의 상상도(?)는 참 아스트랄했다.
아스토르가 대성당에 들어서니 세상에, VR기기가 있네?!
VR기계를 착용하고 플레이를 누르니 성당 소개가 시작되는데, 성당의 바깥과 안쪽이 모두 3D모델링으로 구현되어서 360도 회전이 가능한 의자에서 최첨단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VR에서는 3차원으로 눈앞에 성당이 펼쳐지면서 성당 소개 3d 영상이 자동으로 진행되는데, 나의 시선에 따라서 보고 싶은 곳을 두리번 거리면서 볼 수 있다. 어렵게 따로 조작하거나 이동할 필요도 별로 없다. 마치 비행기구를 탄 것 같이 성당 안팎을 상당히 높은곳까지 조망해주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성당 내부의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뷰라든지, 성당 바깥의 하늘에서 성당 천장을 내려다 보는 뷰 등을 체험할수 있다.
이미 오디오 가이드와 VR서부터 나는 까떼드랄 데 산타마리아 데 아스토르가의 팬이 되면서 (정확히는 IT책임자의 팬인건가) 없던 신앙심도 생겨날 지경이었다.
성당은 부르고스 대성당만큼 웅장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관리가 잘 되고 고급스런 인상이었다. 깔끔하고 단아하다고 할까? 정면의 예수상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의자들이 배치되어있어 성당을 상당히 다양한 시각에서 앉아서 바라볼 수 있다. 앉는 자리마다 정면과 측면에 보이는 미술품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상당히 입체적이다.
그리고 성당 가장자리로 삥 둘러서는 각 성인들의 방들도 잠겨있는곳 없이 다 잘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제 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은 알아볼수 있는 나는 베드로와 요한 사이에서 센터를 맡고 계신 우리 산티아고 사마 야고보의 방을 보며 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웅장해졌다.
스페인은 성당의 조각상이나 기념물이 총천연색에다가 굉장히 화려하고 직관적이다. 그래서 나같이 우매한 사람도 얄팍한 지식으로 야고보 성인을 알아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Chaple of Saint James The Pilgrim
순례자 성 제임스의 채플
크... 취한, 아 아니지. 종교적 성인을 국뽕은 아니지만 암튼 비슷한 류의 갬성으로 기록하는건 너무 교양머리 없는 것 같다. 근데 이제 산티아고 길을 몇 주 걸어오다 보니 원래 종교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믿음과 상관 없이 이 길이 시작될 수 있게 한 최초의 순례자에 대한 경외심이랄까 내적 친밀감이랄까 하는 감정이 조금 생긴 것 같다.
영어로 필그림Pilgrim, 스페인어 페레그리노Peregrio는 순례자라는 뜻인데 야고보의 수식어로 쓰이고는 한다. 산티아고길에서는 참 많이 보게 되는 단어다. ( 순례자 숙소, 순례자 메뉴 등등.. )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명이었던 그는 당시 로마나 팔레스타인 지역을 기준으로 하면 아주 머나먼 땅끝인 이베리아 반도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에까지 복음을 전파하고 돌아왔고 제자 중 가장 먼저 순교했다고 한다.
그 정도의 비장한 사명까지는 아닐테지만 우리는 각각 저마다 충분히 중요한 이유와 동기로 먼 길을 걸어가고 있고, 또한 그의 무덤을 향해서 가고 있기도 하니 가는 여정 곳곳에서 오리지널 순례자 야고보의 흔적을 보게 되면 살짝 찡해지면서 설명할 수 없는 감상에도 잠깐 젖게 된다.
아스토르가 대성당의 다른 채플(챔버?)들도 각기 다른 주요 성인을 모시고 있는데, 앞에 화분을 놓아두는 등 생활속애서 관리되는것 같아 보기 좋았다.
마음이 정갈해지는 성당이었다.
18:40
드디어 밥집이 문을 열었다.
봐 두었던 맛집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배부르게 먹었다. 가격도 디저트까지 총 15유로로 비료적 저렴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더 먹을걸 그랬다. 이 마을 밥값도 괜찮잖아.
19:40
밥을 다 먹고 나왔다. 여행온 뒤 처음으로 ATM기에서 현금 인출을 했다. 300유로를 뽑았는데 44만원이 빠져나간 것으로 봐서 한 2만원 정도 손해본거 같다. 체크카드로 바로 결제하는게 나은거였군. 하지만 알베르게나 시골마을에서는 현금이 자주 필요하다.
20:00
드디어 오늘의 걷기와 마을 관광까지 모두 마쳤다.
해질녘의 가우디 건물과 성당을 다시 한번 보고, 예쁜 초콜렛 가게에서 간식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