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토르가의 아늑한 호스텔에서 아침을 먹은 뒤 또 길을 떠난다. 오늘부터는 끝이 없을 것만 같던 해발 800미터 대의 고원지대를 탈출하여 산으로 올라가는 코스다.
멋진 마을 아스토르가에 하루밖에 머물지 못해 아쉬웠다.
안뇽... 가우디...VR성당... 언젠가 꼭 다시 찾아올게요
메세타를 빠져나오니 귀신같이 날씨와 계절감각이 돌아왔다. 가을의 나무와 선선한 아침 공기, 뜨는 해의 빛을 받은 발그레한 하늘.
메세타에서도 아침 저녁은 꽤 서늘했지만 계절감각이 없이 일조량과 온도만 냉정하게 바뀌는 느낌이었다. 건조하고 황량해서 그랬나? 이제 황무지를 완전히 끝내고 산길에 가까워지니 발로 밟는 흙의 감각, 공기의 습도, 나무의 빛깔 등 오전 오후의 시간과 계절감이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역시 메세타랑 안맞나봐. 하지만 또 몇몇 최고의 순간들은 메세타에서 맞이했다는게 아이러니.
동쪽에서 서쪽으로 걷기 때문에 동이 틀 때 앞에 보이는 구름과 풍경이 뒤에서 오는 빛으로 분홍빛으로 물드는건 언제 봐도 따스하다. 오늘의 걷는 길은 메세타 빛깔의 허연 자갈길이 좀 이어지다가, 고도가 완만히 높아지면서 서서히 온화한 흙길로 바뀌어갔다.
그래 이맛이야. 발바닥에 전해오는 흙바닥의 폭신함과 촉촉함. 조금 힘을 들여 걸어야 하는 완만한 오르막이지만 평평하고 까칠한 지면보다 훨씬 걷기가 좋고 힘이 난다. 갑자기 어렵지않은 과제를 까칠하게 주는 리더보다 난이도 있는 과제를 부드럽게 주는 리더가 훨씬 나은게 아닌가 하는 개똥철학같은 생각도 들었다.
코스도 짧고 날씨도 적당히 흐리고 여러가지로 역대급 쾌적한 컨디션에서 가뿐하게 걸었다. 마지막 한시간 정도는 처음 뵌 한국 순례자분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오늘의 목적지 라바날 델 카미노에 도착!
보통은 조금 더 가서 있는 마을 폰세바돈이 훨씬 인기있는 지점이지만 숙소 예약이 쉽지 않았다. 더불어 이 마을에 있는 숙소에서는 김치랑 라면을 판다고 들었기에 어제 전화로 예약을 잡았다. 그러고보니 어제는 그 패키지여행보다 더한 근면한 일정 와중에 전화 예약까지 했었네?
캬 정겨운 숙소분위기, 곳곳에 한글까지.
이 마을 수도원에 한국인 신부님이 계셔서 알베르게에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 주시고 신라면도 전파해 주셨다고한다. 대체 얼마만의 김치던가. 얼마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출발한 뒤 카미노 걸으면서 김치 구경은 한번도 못했다. 사람들의 후기를 보니 유러피언 김치가 아닌 제대로 만든 조선의 맛 김치라고 하니 더더욱 기대가 된다.
사장님 저는 2번하고 3번하고 4번을 먹을 준비가 되어있어요.
숙소 입구에 대구 남매분들이 먼저 와계셨는데 늘 그렇듯 와인에 콜라를 탄 칵테일인 깔리모쵸를 한잔씩 하고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난 순간, 그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어제 한국인 단체분들이 여기 숙소에 왔다 가시면서라면과 김치가 동났단다. 남매분들도 라면과 김치는 구경도 못하셨다고 한다.
여기를 지나 더 멀리 가실 예정이지만 한국식 점심을 고대하며 같이 걸어온 한국인 동행분과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분은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고 마저 걸어가실 계획이었으나 그만 김치냄새도 못 맡아보고 망연자실 가던 길을 마저 떠나시고 말았다.
뭐 어쩌겠어. 그래도 간만에 점심시간에 가까운 시간에 밥먹을 찬스니 먹을수 있는 것을 먹기로 했다. 계란 돼지 빵 와인이다. 김치만 있으면 완벽하지만 뭐 나는 외국음식 잘만 먹고 다니는 것으로 포지셔닝 하고 싶은 케이아재니까 쿨하게 먹어야지. 암 그럼.
그리고 나서는 곧바로 쿨하지 않게 조그만 마을의 유이한 슈퍼마켓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전능하신 구글맵의 리뷰를 보니 근처 슈퍼에서 라면을 판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돌아다니다보니 마을이 참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돌로 건물과 돌담들로 오밀조밀한 마을이었는데, 표지판이나 장식들을 아기자기하게 만들어 놓은게 약간 동화속 작은 마을 같다.
첫번째 슈퍼에서는 허탕치고 두번째로 찾아간 마을지도 12번의 슈퍼에서 신라면을 발견했다. 물론 나의 가방에는 레온에서 챙겨놓은 짜파구리 재료 라면 2종이 있었으나, 오늘은 신라면 삘이다. 개당 무려 3.5유로로 꽤나 비싸지만 그래도 놓칠 수 없지.
어제 같이 걸은 이선생님도 숙소에서 다시 만나서 마트에서 이것저것 함께 장을 봐온 뒤 오랜만에 케이 순례자 만찬을 완성했다.
- 홍합 통조림과 양파를 첨가한 한국 신라면x2
- 간장으로 맛을 낸 올리브 야채 샐러드
- 토마토 계란 양파볶음
- 밥
- 아스토르가 특별 디저트
여전히 사진을 좀더 상세히 찍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만, 공용 주방을 쓰는 순례자에게 사진 로망은 사치지. 김치만 있었으면 더욱 완벽한데 또 아쉽군.
저녁에는 라바날의 수도원에서 주관하는 기도 시간이 있었다.
여기 수도원은 독일의 베네딕트 수도원 소속이라고 하고 거의 매일 저녁 정기적으로 기도시간이 있는 듯 했다. 성당은 아니고 미사도 아니고 기도의 시간이라고 한다.
기도는 네 분 정도의 신부님들이 진행하셨는데 모든 기도가 노래로 진행된다. 일종의 그레고리안 성가일까? 작은 돔형 성당에 신부님들의 노래가 울려퍼지니 참 홀리하고 신비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탄수화물을 넘 많이 먹었는지 듣다 보니 조금 졸린것 같기도 했다.
기도 시간을 진행하신 네분 신부님 중 두 분이 한국의 신부님이셨다. 원래 계셨던 신부님은 이제 쿠바로 가셔야 하고, 새로 오신 신부님은 마드리드에서 어제 급하게 오셨다고. 아마 인수인계 기간인 듯 했다.
기도의 시간이 끝나고 조용해진 예배당에서 한켠에 계신 산티아고님께 초를 하나 밝히고 늘 그렇듯 같은 소원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