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발한 라바날 델 카미노에서 폰페라다까지는 30킬로가 넘는 길이었다. 게다가 등산 + 등산보다 더 무서운 하산의 코스. 1500 고지의 철십자가에서 시작해 거의 고도 1000미터를 급경사로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때보다 항상 더 지루하고 더 위험하다.
이선생님이랑 어제 이야기 하다가 날씨가 안좋거나 하면 중간에 택시를 타자고 미리 얘기를 해 두었었는데, 사실 이미 그렇게 얘기한 순간부터 택시는 마음 속의 메인 옵션이 되어버렸다.
- 이선생님 물집고통 + 나 아직 발목 불완전
- 현재 폼으로 30키로 등하산이 과연 가능한가
- 하산길의 위험성
- 이미 몇번의 하산에서 경험한 풍경없음
- 점프 한번이 어렵지 두번이 대수냐
등등 모든 논리적 추론이 택시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맘편하게 철의 십자가에서 하산 길 첫번째 마을까지만 걷고 거기에서 밥먹고 택시를 잡기로 했다. 그렇게 하니 이제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행복 산행이 되었다. 평화로운 산길 풍경에 쉼터에서는 오랜만에 소도 보고 간식 얻어 먹으려는 멍멍이도 있었다.
매일 보는 경로상의 표지석에 232km가 써있다. 아니 어느새 거리가 이거 밖에 안남았지? 하루에 평균 25km 를 간다고 치면 이제 정말 손으로 꼽을 수 있는 날짜만 남았다. 남은 일 수가 머리속에 쉽게 그려진다. 300킬로 이후에는 갑자기 빠르게 줄어드는 기분이다.
이윽고 하산길 첫번째 마을 엘 아세보에 도착했다. 느긋하게 밥도 먹고 예쁜 마을 구경도 했다. 산속 마을이라 그런지 돌들을 켜켜이 얹어서 지은 고유의 건축 스타일이 개성있다. 점심께쯤 도착하여 볼 수는 없었지만 이 마을은 노을 풍경이 아주 예술이라고 한다. 수영장이 있는 근사한 숙소도 있었는데 데여름에는 저 숙소에 묵으면서 노을 보면 딱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밥 먹고 마을 구경을 잠시 한 뒤 식당 주인장에게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우버앱 같은 것을 쓸 수도 없어 보이고 스페인어도 되지 않으니 역시 사장님께 부탁하는게 맘편하다. 택시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 도착했다. 작은 죄책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기사님 포르빠보르. (Por Favor 는 영어로 치면 Please의 의미다. 걸으면서 배운 몇 안되는 스페인 어휘 중 하나)
차는 구비구비 산길을 내려가 얼마 안걸려 도착했다. 걸었으면 서너 시간 걸렸을텐데 차로는 이삼십분 걸렸다. 멀게만 보이는 길을 차를 타고 허탈하게 도착해버리는 체험은 참 미묘했다.
숙소에 도착해 체크인하고 샤워하고 나서도 기력이 남았다. 이럴땐 시내 구경을 나갈 타이밍!
폰페라다는 내가 걷는 산티아고길 프랑스길에서 거치는 마을 중 대도시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큰 도시였다. 인구가 6만이라고 하니 10만이 훌쩍 넘는 레온같은 도시들 보다는 작지만 대부분의 마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도시다. 루트 상의 도시 중 유일한 중도시(?) 포지션이자 레온과 멀지 않아 연박은 하지 않게되는, 순례길 관점에서는 약간은 과소평가받는 비운의 도시가 되겠다.
맥도날드도 곰방 갈 수 있는 도시건만! (못갔음)
폰페라다에서는 단연 눈에 띄는 큰 성이 하나 있다. 템플기사단의 성채Castillo de los Templarios 이다. 성채는 강을 끼고 다소 불규칙한 형태로 지어져 있는데 꽤 웅장하면서도 방어에 용이할 것 같이 듬직하다. 12~13세기에 지어진 요새로 당시에 이 도시와 템플기사단은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돌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성채를 지나 걸어가니 오래된 시계탑을 중심으로 구시가지가 나왔다. 택시타고 도착해 멋진 마을도 보고 기념품 가게 들어가 구경하고 쇼핑도 하니 워라밸 밸런스가 딱 맞는 느낌이도다.
숙소로 돌아오니 1층의 공용 식당 공간에서 이선생님이 처음 뵙는 한국 분들과 함께 앉아 계셨다. 분당에서 오신 누님들과 오늘로 순례길을 마치고 내일 바르셀로나로 떠난다는 모녀분들이다. 자연스럽게 합석했다가 아직 저녁을 못먹었다고 하니 아까 함께 식사하다 남은게 있다며 중국식 덮밥을 나눠주셔서 감사히 먹으면서 이런 저런 수다를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