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 300 남았을 때까지는 그저 멀게만 보였는데 이제 200km 언저리가 되니 남은 거리가 확 체감이 된다. 하루하루 빠르게 줄어드는 기분. 하루 25km 걷는다 치면 딱 8일정도 남은 거리다. 아쉬운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오늘도 이선생님과 함께 걷는다. 어둑어둑한 폰페라다 도심을 빠져나와 외곽으로 향했다.부산에서 오신 이선생님은 연배로는 우리 작은이모 쯤 되는 분이다. 순례길 초반에 한두번 마주쳤다가 레온 이후로 자주 함께 걷고 있다.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이제 여행도 다니고 세상 구경도 하시려고 작년인가 재작년 몰타로 영어를 배우러 다녀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올해 홀로 산티아고 길을 출발해 이렇게 우연히 만나 함께 걷고 있는데, 이 길을 걸으면서는 이제 천주교 신앙을 가져볼까 고민하고 계시다고 한다. 낯설고 힘든 길에 용기 내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씩씩하게 홀로 오신게 대단하고아직 청년같은 생각과 고민을 들려주시는게 또 새롭게 보인다.
오늘 걸어야할 길은 폰페라다에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조까지 약 24km의 거리이다. 초반의 에스떼야 전후의 길처럼 온화하고 걷기 좋은 코스였다. 찻길 변의 코스가 좀 있었으나 도심만 빠져나오면 차량도 크게 많지 않았고, 비가 조금 오는듯 하다 종일 흐리기만 하여 날씨도 덥지 않고 매우 쾌적하였다.
중간에 여러개의 작은 마을을 지나다가 보니 카카벨로스라는 마을의 골목길에 풀페리아 콤포스텔라라는 식당이 보였다.풀페리아는 문어 파는 식당이라는 뜻, 콤포스텔라는 순례길의 목적지 산티아고Santiago de compostela의 뒷부분 이름이다.문어모양의 간판도 무척인상적이다. 마침 점심 먹을 때도 되어 약간 홀린 듯 요기도 할겸 들어가 보기로 했다.
식당 내부는 아직 한가하고 갈리시아 스타일의 문어를 파는 곳이라는 안내가 쓰여있다. 나온 음식을 보니 데친 문어를 올리브 오일, 고춧가루, 소금으로 양념해 뜨겁게 내어놓는 요리이다. 스페인 사람들도 문어를 좋아한다고 들어서 한번 먹어야지 했는데 여기서 드디어 먹게 되는군.
맛은 딱 생각하는 그맛이다. 문어가 야들야들하고 양념이 칼칼하여 이선생님이랑 꽤 맛나게 먹었다.
이후 오는 길은 거의 내내 포도밭이었다. 목적지인 비야프랑카에 부근도 와인이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도착이머지 않은즈음 엄청나게 관리가 깔끔하게 되고 언덕위의 하얀집까지 예쁘게 지은 초 프리티 포도밭을 발견하게 되었다. 포도밭이 예뻐서 와인이 궁금할 정도.
검색해보니 Cantariña Vinos de Familia 라는 와이너리하고 한다. 나중에 숙소에 와서 주인장에게 혹시 이집 와인 있니 하고 물어보았더니 없다고 하고서는 자기 가족이 한다는 로컬 와인을 내주었다. 그것도 상당히 맛있었고과실향이 진한 맛이었지만 예쁜 포도밭의 와인을 맛보지 못한 건 아쉬웠다.
그나저나 담벼락에 마이클 잭슨은 왜이리 자주 발견되는걸까? 신흥 성인으로 추대되고 있는걸까? 성당 챔버에 마이클잭슨이 있으면 흥미롭긴 하겠다.
얼마를 더 걸어 오늘의 목적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조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는 용서의 문이 있었다. 그 옛날에는 피치못할 사정으로 산티아고까지 가지 못한 순례자가 있을 때 이 문까지 도달하면 순례를 인정해주고는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용서의 문이 있는 작은 성당의 이름도 Iglesia de Santiago로 산티아고 성당이다.
주변의 마을 성당같이 본당이 있는 작은 성당은 이글레시아Iglesia 라고 하고, 보다 규모가 있는 주교좌 성당을 카테드랄Catedral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여기는 이글레시아고 우리가 찾아가는 산티아고의 성지는 카테드랄이다.
여튼, 용서의 문에 도착했으니 나는 이제 순례를 사실상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것이군요... 오호?!
오늘 도착한 마을은 스페인 하숙이 촬영된 곳이기도 했다. 순례의 후반이 되는 길목에 있으며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조용한 마을. 많은 사람들이 묵어가는 비교적 큰 도시 폰페라다에서 출발하면 대부분 여기서 묵게 되는 곳이자, 생장에서 출발한 여행자였으면 오랜 시간 동안의 피로와 향수가 쌓였을 시점이다.
그곳에 한국의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알베르게를 잡았으니 여러모로 로케이션을 상당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스페인 하숙 알베르게를 한번 휙 둘러보았다. 요즘은 한국인들이 어슬렁대면 인심 사나운 할매가 나타나 내쫓는다고 들었지만, 내가 간 시간에는 아무도 없이 한적해서 입구에서부터 프론트까지 볼 수 있었다. 스페인 하숙은 나도 가끔 즐겨봤지만 그때는 카미노를 걷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지.
수도원 건물인 스페인 하숙은 한번 눈에 담는 걸로 만족하고, 우리는 부킹닷컴 평점 최고의 신식 알베르게에서 쉬었다. 2층침대가 없고 모두 1층 침대인 역대급 쾌적 알베르게다. 로망은 수도원, 편리함은 요즘 건물. 어제 폰페라다에 이어 매우 쾌적한 숙소였다.
숙소에 먼저 와 계셨던 대구 남매분들이랑 이선생님이랑 다같이 저녁을 먹으며 잔잔하게 하루가 지나갔다.
... 인줄 알았으나, 나중에 들으니 우리 방 말고 이선생님 계셨던 옆방에서는 새벽에 웬 술취한 숙박객이 난동을 피워서 다들 고생하고 잠을 설치셨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아까 포도밭 지나올 때도 우리에게 사진 찍어달라는데 태도가 아주 불쾌한 순례객이 있었는데. 진상 보존의 법칙은 카미노에서도 유효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