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도착한 마을 오세브레이로는 길고길었던 카스테야 이 레온 주가 끝나고 갈리시아Galicia 주가 시작되는 곳이다. 목적지인 산티아고도 이 갈리시아 주에 속한다. 마을의 표기는 O Cebreiro로 하는데, cebreiro를 갈리시아어로 구글번역하니 '뇌' 란다. 그러고보니 브레인이랑 비슷한 발음이네.
두뇌마을 내지는 두뇌촌인가..?
기계 문명의 힘으로 도착하니 시간도 체력도 여유가 생긴다. 모처럼 묵는 대형 공립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한 뒤 마을을 좀 둘러보았다. 마을은 작고 아담하다. 건물들이 돌들을 켜켜이 얹어서 고산지대 특유의 비슷한 모양으로 지어져 예쁘다. 스페인 스타일 너와집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마을을 좀 둘러보다 보니 대구 남매 분들이 도착하셨다. 오늘 아침에 같은 숙소에서 출발했는데, 그분들은 걸음도 워낙 빠르게 잘 걷는 분들이라 시작부터 한참을 앞서서 가셨을 게다. 우리가 먼저 도착해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라시길래 이선생님이랑 택시를 탔다고 이실직고를 했다.
아니 아침에 짐도 동키로 부치더니 중간에 택시까지 탔단 말이야 짐을 보내든지 택시를 타든지 하나만 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신다. 그러게요 이것이 진정한 자본주의 순례라고 맞받아쳤다.
폰페라다에서 뵈었던 분당 누님들도 여기에 와 계셨다. 저녁은 이선생님이랑 분당누님들과 함께 했다. 여기서부터는 갈리시아이니 만큼 이제 순례자들에게 우거지 된장국으로 알려진 갈리시아 수프를 먹을 수 있다. 된장 맛은 안나지만 얼추 비슷하다. 빠에야랑 함께 먹으니 아쉽지만 그럭저럭 국밥이 되는군. 역시 한국인은 뜨끈한 국밥 든든하게 먹어야겠쥬? 비노띤또는 필수쥬?
아차차,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이 마을은 현재의 산티아고길을 정의하고 부활시킨 사제 엘리아스 발리냐가 신부님으로 계셨던 마을이다. 1929년에 태어나 1989년에 숨진 엘리아스 사제는 1965년 살라망카에서 공부하며 카미노에 대한 논문을 쓴 뒤 평생을 카미노를 복원하는데 힘썼다고 한다.
학회를 만들어서 중세의 순례길을 연구하고,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교구와 지자체를 설득하고, 자신의 낡은 차에 노란색 페인트통을 잔뜩 싣고 다니며 직접 우리가 보는 노란색 화살표를 그리고 다녔다고. 당시에는 페인트통을 들고 다니는 미친 사제로 통했다고 한다.
상상해보면 웬 낯선 중년의 아저씨가 노랑 페인트를 들고 마을 벽이며 나무 등 여기저기에 화살표를 그리고 다녔으니 당시 사람들은 깜짝 놀랐겠지.
그게 70년대 80년대로, 사실 카미노는 우리의 상상처럼 중세부터 지금까지 쭉 카톨릭의 성지순례 길이 아니라 20세기 후반에 다시 발견된, 또는 재정의된 길이다. 최소 수백년은 되는 오랜 세월 소실되었다가 한 사제의 집념과 노력으로 다시 태어난 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발리냐 신부님은 그야말로 카미노의 아버지.
이 마을에는 그를 기리는 흉상이 있고 마을에 성당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사람들이 초를 화살표 모양으로 밝혀놓았다. (화살표 덕후는 돌아가신 뒤에도 화살표 모양 은총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시 발견해 준 엘리아스 사제 덕분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영감을 받고 있다. 길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가장 저렴하고 멋진 레저관광으로 유럽을 장기간 체험하기도 한다.길 중간 중간 있는 많은 시골 마을들은 카미노와 순례자들 덕에 유지된다.
나도 그 덕분에 이 길을 걷고 있다.
그가 이 마을에 있다는걸 알게된 건 평소에 종종 듣는 탁피디 여행수다 팟빵 덕분이다. (길을 걸으며 이 방송의 카미노편 도움을 많이 받았다)누군가의 노력과 창의성은 다른 누군가에게 우연히도 참 많은 도움을 주니 그것이 카미노의 기적일까?
저녁에 다녀온 오세브리오 성당 미사의 순례자 축복 시간에서는 화살표가 그려진 조약돌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카미노를 기획한 사제의 마음처럼 조약돌도 동글동글하고 예쁘고 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