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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수달 Nov 18. 2023

이 길이 아닌가벼

31일차, 비야프랑카에서 오세브레이로


깜깜한 새벽하늘 아침 공기를 가르며 길을 나섰다. 오늘도 이선생님과 함께 걷는 길이다. 출발한 뒤 얼마 안되어 반가운 싱가폴팀을 만났다. 싱가폴팀은 함께 그룹으로 걷고 계신 분들로 꽤 오래 전인 로그로뇨쯤 부터 길에서 자주 마주치고 있다. 남자 3명 여자 2명의 팀인데 부부이실까 아닐까 매우 궁금하다.


싱가폴팀을 따라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을 힘차게 올라갔다. 아직 어둡지만 상쾌한 아침공기, 가파른 언덕,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은 생각보다 산을 오르는 가파른 길이군. 숨은 좀 차지만 내리막은 몰라도 오르막은 자신있지. 많이 올라오니 산등성이에서 보는 일출빛도 멋지다.



알고보니 우리가 오던 길이 카미노 정규코스가 아니었다는걸 알아챈건 신나게 산을 오르고도 한참이나 걸어버린 이후였다. 알고보니 싱가폴팀은 일반적인 산티아고 마을길이 아니라, 산을 올라 산등성이나 능선으로 오세브레이로까지 쭉 오는 일종의 지름길을 택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꽤나 높이 올라와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 오세브레이로는 해발고도 1000 미터가 넘는 고지라, 이정도 가파르게 올라왔으면 앞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게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며 네 시간정도 걸어가면 아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근데 나랑 이선생님은 마을길을 예상하고 있어서 물도 간식도 별로 안챙겨온 터라 이대로 산길을 네 시간이나 쭉 갈수는 없었다. 높인 고도가 아깝지만 다시 마을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여기서는 정규 루트로 돌아가려면 트라바델로 쪽으로 가야 한다.



순례길을 걷다보면 참 계획대로 안된다는걸 깨닫게 된다. 정보와 준비도 부족하고, 시간과 체력도 따라주지 않는다.


오늘의 원래 계획은 걸어가다가 20km 쯤 온 부근에서 이선생님을 택시 태워 먼저 보내드리고, 나는 그때부터 시작되는 나머지 10km의 산행을 마저 하는 거였는데 시작에서 이미 꼬여버렸다. 트라바델로 도착이 계획보다 한시간 이상 늦었고 그냥 평지로 오면 되는 트라바델로를 등하산을 하면서 한참 돌아와서 체력도 이미 많이 썼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 갈수도 있다.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카미노에서 목적지에 저녁무렵 도착하는건 가장 안좋은 시나리오중 하나다. 회복할 시간이 줄고,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을 수도 있으며, 식사도 애매해진다. 여정은 늘 늦어도 3시쯤 끝내는게 좋다.



일단 걸어 보면서 양떼와 고양이를 보며 잠시 강원도의 언덕에 작은 농장을 하며 개 고양이 소 닭을 방목하고 싶다는 공상을 하던 나는 다시 냉정하게 오늘의 일정을 염두하며 멧돌을 돌리기 시작했다.


<현재 상황>

- 이미 거의 1시 임박

- 이대로 강행하면 5시 이후 도착 예상

- 이선생님 발상태 아직 별로, 브루고스서부터 쉬는 날 없이 오셨다고 함. 혼자 택시 안타실 기세.

- 남은 길 중 후반은 600미터 고도를 올라가는 산길

- 내 발은 좋아지고 있지만 하루에 산 두번 올라갈 컨디션은 아님


<강행시 예상 시나리오>

- 강행하면 뿌듯할 것임

- 도착하면 마을 둘러볼 시간도 없이 빡세서 불행지수 높아질 것임

- 강행 시 3시 영상통화 미션이 산행중 과연 가능할지 미지수

- 강행하면 아마 왼쪽다리가 뻐근하겠지?


<고려사항>

- 어제 용서의 문에서 알고보니 용서 받음. 대충 순례여부는 달성한 듯도 함. (마치 셀프 용서인것 같지만 스페인 문화재청 공식 설명에 써있으니 인정하도록 하자)

- 그러면 불행과 부상리스크를 감수하고 과연 강행을 할 것인가? 아니면 택시를 부를것인가?


이대로 강행하면 행복감을 잃게돼

강행하지 않으면 뿌듯함을 잃게돼

톡투미 구스


어찌 할까 하면서 베가 데 발카르스까지 온 우리는 지나가다 발견한 예쁜 카페에서 끝내주는 사과파이와 고져스한 산티아고 케익을 먹으면서 마음을 정했다. (이선생님이랑 어떻게 할까요 하면서 이야기했지만 이미 앉아서 사과파이를 한입 먹은 순간 우리 둘 다 더 걸을 생각은 없어진 것도 같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빵 전문점인줄 알았는데 옆 사람들이 식사 메뉴도 시켜먹길래 우리도 시켰다. 사실 사람들이 좀 적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기는 동네 맛집이었는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지나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도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이 좀 때까지 시간을 끌려고 주문한 감도 있다. 적당한 타이밍에 주인장에게 그분을 불러달라고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자꾸 손님많아지는 거야. 와중에 집은 식사도 맛집이었다.



그나마 밥을 먹고 나니 점심 먹은 사람들이 조금 빠져가나고 문전성시는 아니다. 여전히 테라스에는 순례자들이 많지만...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이제는 용기를 내야지. 주인장에게 다소곳하게 택시좀 불러주세요 하고 말씀드렸다. 아까는 순례객들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가게 안에서 택시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가게를 나와 뒤통수에 민망함을 느끼며 택시에 올랐다.

민망은 잠깐이었고 도착은 순식간이었다.

지나오다 본 산길 오르는 순례자들의 뒷모습은 조금 감동적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과학과 자본의 힘을 조금 빌려 단숨에 12km의 거리와 600m의 고도를 돌파했다.

높은 곳에 오니 바람이 좀 차가웠다.


한번이 어렵지 두번은 쉽군.

나는 이선생님을 안전하게 산티아고길의 마지막 산길에 모셔다드릴 운명이었나 보다.

사실 내 다리도 좋아지고 있으니 선생님은 핑계고 결국 나를 위한 것 같기도 하다.



10월 18일 화요일 오세브레이로

오늘 걸은 길 약 16km (정규 코스 기준이고 산길로 돌아왔으니 20km는 될 듯 하다)

택시탄 길 약12km

산티아고까지 약 15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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