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생일이다. 그리고 코스는 오세브레이로에서 시작해 사모스까지. 출발점이 1200 넘는 고지이니 산에서 시작해 고도를 내려서 쭉 하산하는 길이 되겠다. 거리는 꽤 되지만 며칠 체력도 아꼈겠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내리막에 경치도 좋다고 들었기에 충분히 즐겁게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호젓하고 멋진 사모스에 도착해 생일맞이 맛있는거 사먹어야지.
하지만 타이슨이 그랬던가?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은 있다 핵펀치를 맞기 전까지는이라고.
나의 계획은 시작하면서 비가 오기 시작하여 바로 제동이 걸렸고 또다시 싸구려 다이소 판쵸를 입고 출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비는 강풍을 동반한 산중 핵펀치 비였다.
판쵸를 뒤집어 쓴 상태로 뒤에 있는 사람의 플래시 불빛을 받으니 실루엣이 그럴듯 하다. 어둠속의 비장한 비밀 기사단같은 로망이 든다. 하지만 현실의 다이소 판쵸는 강풍에 옆 똑딱이 단추가 자꾸 풀어져 너덜댔고 (대체 통으로 만들지 단추는 왜 있는걸까) 비에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는 왜 이런 날씨에 산길을 걸어서 하산하고 있는걸까? 속으로 다양한 육두문자를 되뇌이며 정신없이 걸어갔다.
사진에 비바람이 표현이 안되는게 아숩군. 전혀 이런 느낌이 아니라 세차게 몰아쳤는데 말이지.
도로 길로 나서니 바람이 더욱 더 세게 불었다. 가벼운 사람은 날아가겠다. 바람 때문에 비가 위가 아니라 옆에서 내리치는데 판쵸고 고어텍스고 뭐고 장사 없다. 출발한지 한두 시간 만에 바지며 속옷이며 신발 속까지 싹 젖어버렸다. 신발에 물이 스멀스멀 점점 차오르는 느낌은 매우 별로다.
그렇게 비바람에 온통 젖고 날리면서 아스팔트 길을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저 멀리 어슴푸레하게 수레를 끄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어 설마? 속도를 높여 조금 더 가까이 가 보았다. 아... 맞다. 순례길 초반에 자주 마주치던 수레를 끌고 걷는 순례자 부부다.
멀리서 그분들을 보니 순간 울컥했다.
마지막으로 뵌게 어디쯤이었을까. 메세타부터는 못뵌 듯 한데. 사진 한번 찍어드린 인연으로 나를 볼 때마다 포토그래퍼! 하고 반겨주던 분들. 말도 하나도 안 통하지만 수레를 끌고 가는 그들을 마음 속으로 응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두 분 나이도 있으시고 수레 밀면서 오시려면 오래 걸리실 것 같아 아마도 한참은 나보다 뒤에 계실 줄 알았는데, 이 비바람 난리통에 저 앞에 갑자기 나타나셨다.산티아고까지 못뵐거라 생각했는데 이 빗속 난리통에 재회할 줄이야.
성큼성큼 걸어가 매서운 비바람 속에 목청껏 올라Hola 하고 인사를 했다. 처음엔 누군지 못 알아보시길래 모자며 후드며 꽁꽁싸맨 얼굴을 드러내니 그 분들도 알아보고 반갑게 아는 척을 하신다. 저에요 포토그래퍼. 그 수레를 끌고 여기까지 무사히 오셨네요. 저도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지만 여기까지 잘 왔어요. 오늘 비바람이 매서운데 조심히 가세요. 너무 반가웠어요 산티아고에서 기다릴게요 꼭 만나요.
조금 더 걷다가 중간에 바가 나오길래 잠시 들러 몸을 녹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들어와서 북새통이다. 창문을 보니 비가 바람에 날려 45도로 오고있네?
이건 택시 타이밍인데... 택시를 탈 거면 출발할 때 탔어야지 다 젖어서 억울하다. 잠깐 문밖에 나가보니 옷이 젖어 있어서 엄청시리 춥다. 이 온도감 무엇? 순례길 중 이렇게 춥기는 처음이다. 저체온증 걸릴 지경이다. 얼른 다시 들어왔다.
바 안에는 대구 남매분들도 와서 비를 피하고 계셨다. 따끈한 차를 시켜놓고 몸을 녹이다가 저 사실 오늘 생일인데 무슨 고생길인지 모르겠네요 하니 그럼 내가 택시라도 불러줄까 하신다. 말씀만으로도 고맙다. 차 한잔을 더 마시며 어쩔까 생각하다가 바에 계시던 많은 한국인 분들도 출발하시고 하시길래 그냥 다시 가보기로 했다. 몸은 꽤 녹였고 판초 뒤집어쓰고 걸으면 열이 차서 금방 온도 유지가 될 것도 같다.
생일날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오늘은 대차게 가고 싶단 말이지.
사람이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살수는 없지만 생일에는 하고싶은 걸 좀 해야하기도 한다.
그것이 생일이니까?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니 몸에서 뿜는 열기로 다행히 체온유지는 잘 되었고, 고도가 낮아질수록 바람도 잦아들고 칼바람도 사라졌다. 그리고 멀리 가야할 방향으로는 맑은 하늘이 보였다.
산을 다 내려오면 나오는 마을 트리아카스텔라에 도착하니 비가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듯 좀 쨍쨍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거기서 식당 하나를 찾아들어가 이것 저것 먹고싶은 걸 시켰다. 스페인 종업원이 대체 이건 무슨 근본 없는 조합이지? 하는 표정이었지만 사실 나에게는 큰 그림이 있었으니 바로 생일 맞이 완벽한 조합의 한상차림이었던 것이다.
바게뜨 - 밥
갈리시아수프 - 국
파드론 페퍼 (스페인식 고추볶음) - 야채반찬
버섯계란햄볶음 - 고기반찬
그리고 와인이 대충 김치 역할을 하니 영양적으로도 매우 균형잡힌 꼬레안 한정식 같은 스페인 한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깃살 미역국이 먹고싶었쥬 ㅜ.ㅜ
밥을 먹고 나오니 홀딱 젖었던 온몸이 그대로 다시 말라가던 즈음, 사모스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트리아카스텔라에서는 다음 목적지 사리아까지 길이 두갈래로 나뉘는데 왼쪽방향이 조금 더 먼 길이다. 하지만 중간에 사모스를 방문할 수 있다.
사모사랑 헷갈리기 쉬운디 사모사는 인도 튀김요리, 사모스는 여기 지명.
사모사
사모스
트리아카스텔라에서 사모스 가는 길은 순례길 중 손에 꼽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동안 없었던 풍경같았는데 여기는 숲길보다 오히려 도로로 따라가는 길이 차도 안많고 시원하고 멋있다. 왼쪽으로는 계곡, 오른쪽으로는 산등성이랄까 암벽뷰가 이어지는 상쾌한 풍경이다. 비온뒤의 상쾌한 풍경은 언제나 옳지.
그렇게 경쾌한 길을 젖은 옷을 거의 뽀송하게 다 말려가면서 (신발은 안마르더라) 오늘의 목적지 사모스에 도착했다. 12세기에 지어졌다는 천년 된 수도원도 보고 미사도 들어가 보았다. 미사는 향로에 연기를 피우는 일종의 향로미사였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고 다소 휑해선가 그다지 감흥은 없었다.
저녁에는 마을 입구서 우연히 또 만난 (요즘 길에서 자주 마주친다) 브랜든 아저씨와 함께 따님 피셜 이 동네 최고 맛집 식당에 갔다. 브랜든 아저씨는 코골이가 심해서 여태까지 늘 독실 숙소에서만 머물면서 순례길을 걸었다고 한다. 호주에 있는 따님이 예약도 해주고 마을마다 어떤 식당이 좋으니 가라고 깐깐하게 코칭도 해주고 있다고.
내년에 은퇴한다는 브랜든 아저씨는 내 딸이 나를 조종하고 있어 라면서 툴툴대는듯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딸자랑이었군. 따님 말씀도 잘 듣고 다른 사람 배려해서 매일 독실 숙소도 잡는 따순 마음의 츤데레같은 양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