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를 줄이기 위해 여벌의 옷가지며 잡동사니를 여행 내내 조금씩 버려왔고,하다못해 일회용 렌즈며 핸드크림도 끼고 발라서 사라져갔다. 이제 나에게는 남은 길을 위한 최소한의 소지품, 그리고 몇가지 기념품과 로망 물품만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작은 마을 사모스의 숙소를 떠나며 남은 몇몇 미련을 마저 버리기로 했다.
라면이 은근 구해져서, 뜯으면 관리가 번거로울것 같아서, 기회있을때 까먹고 뿌리지 않아 결국 여태 한번도 열지 않은 오뚜기 대용량 라면스프.
알베르게에서 밥 해먹을 때 쏠쏠이 도움을 주던 기코만 간장. (근데 이 간장 안짜고 달달하이 맛있었다) 사실 기회가 되면 간장불고기를 한번 해먹고 싶어서 못 버리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알베에서 음식할 기회가 많이 오지 않았다.
외딴 마을에서 누군가에게 반갑게 발견되길 바랄게요.
그리고 앵무새 보온병을 대체하며 부르고스에선가 샀던 보온병2. 보온력이 약하고 물이 좀 샜지만 몇 번 유용했어... 아디오스... 더불어 가지고 다니던 애플시나몬 티백도 사모스의 알베에 두었다.
너굴이랑 짜파는 사모스 찬장에서 누군가 발견하면 환호하겠지? 하지만 결국 포기 못하고 다시 담음. (근데 나중에 알고보니 포르토마린 오는길에 한국음식 왕창 파는 가게 겸 기념품 상점이 있었다. 그냥 두고올 것을... )
그래서 이제 나는 꼭 필요한 것만 있는 최소한의 배낭 무게, 등에 착 달라붙게 매는 배낭법, 걷는 법, 냉정한 나의 케파 파악, (+이부프로펜) 까지 갖추고 순례 30여일 만에 산전수전 다 겪고 짱짱하게 걸을 수 있는 최적화를 제법 하게 되었다. IT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매우 뿌듯하군.
이제 레온에서 하루 먼저 출발한 마커스를 늘 그랬듯 길에서 만나 따라 잡고 싶은데 (주로 마커스가 바에서 쉬는 나를 따라잡았었지만)연락해 보니 마커스는 오늘 사리아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거기라면 하루 거리는 아니고 반나절 정도 앞서 있군. 오늘 포르토마린까지 가면 거의 따라잡을 정도로 거리가 줄어든다.
꽤나 먼 거리지만 어제 폭우속을 한참 걷고도 컨디션이 괜찮은 것이 이제 다리 아프지 않게 잘 걸을 자신감이 붙었다. 필요할 때는 택시도 마다하지 않을 유연함도 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순례길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배낭 매고 한껏 걸어볼 생각이다. 숙소도 미리 예약을 해 놓으니 일찍 도착할 시간 압박도 없어 발걸음 가볍게 출발했다.
갈리시아의 퇴비냄새 물씬 풍기는 길을 걸으며 돌탑에 돌도 올리고
소떼도 구경하고
누군가를 추모하기도 하며 걸어갔다. 길을 걷다 보면 순례길을 걷던 중 돌아가신 분들의 십자가가 가끔 보이는데 살펴보면 젊은 나이에 카미노를 걷다 사고를 당하신 분들이 계시기도 하다. 볼때마다 안타깝기도 하고 찡한 마음이 든다.
지명이 AIREXE 인 곳도 지나갔다.
에어 exe 라니. IT인으로서 너무 사랑스러운 지명이잖아?!
그리고 이윽고 오늘 여정의 1/3이 조금 넘는 거리에 있는 마을, 사리아에 도착했다. 사리아에서 산티아고까지는 대략 113km 정도의 거리. 100km 이상을 걸으면 순례를 인정하기 때문에 사리아는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여정을 시작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더불어 사리아는 나같이 생장에서 시작해 800km의 프랑스길을 걷는 순례자들에게는 비로소 마지막이 보이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사람들이 엄청 많아진다고 들었는데, 점심 즈음 도착해서인지 성수기가 살짝 지나서인지 날씨 때문인지 마을은 붐비지 않고 조금 썰렁했다.
대략 12시가 조금 안된 시각. 경로상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잠깐 쉬면서 오징어튀김이 얹어진 바게트 샌드위치 (...) 를 점심으로 먹었다. (이건 대체 무슨조합일까?) 구성의 당위성을 의심하며 반쯤 먹다가 문득 식당의 한쪽 구석을 뒤돌아보니 케찹 마요 후추가 있는걸 뒤늦게 발견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