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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수달 Nov 25. 2023

어느새 100km

33일차, 사리아에서 포르토마린


사리아에서 점심을 먹고 났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


배낭을 매고 다이소 판쵸 쓰는건 매우 구린 경험이었기에 더 이상 안할란다. 갈리시아 지방은 영국마냥 (가본적이 없지만) 비가 많이 오는 곳이랬지? 마침 점심 먹은 밥집 바로 옆에 장비파는곳이 있었다. 혹시나 우산이 있나 물어보니 있다고 한다. 나이스 냉큼 하나를 샀다. 15유로. 근데 이 가게는 카드도 안되고 50유로를 드렸더니 한참을 거스름돈을 찾으시던데 이 제품 과연 괜찮은걸까.



결과는...대성공!!!!


우산의 효과는 매우 훌륭했다.

비옷이나 판초는 비올 때 피부 가까이 빗물이 때려 가끔 아프기도 하고 거슬리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빗속을 판초나 비옷입고 걸으면 너무 절박하달까 필사적으로 느껴지는데, 사실 그정도의 감정으로 걷는건 아닌데 뭔가 실제와 현상의 부조화가 느껴진단 말이지요.


우산을 적절히 컨트롤하며 비와 바람을 동시에 막는 시스템과 프로세스는 매우 마음에 들었고, 특히 얼굴 부근을 완벽히 차단해줘서 비바람이 얼굴을 때릴때의 정신적 타격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안경을 썼을때 평정심을 유지할수 있다는 크나큰 장점이 있었다.


역시 비올땐 우산이었어. 

판초 무엇? 논산 훈련소에서도 처음 써보고 깜짝놀란 물건이었는데.


다만 등산 스틱을 짚고 걷는다면 우산을 쓰기는 곤란하고, 바람이 꽤나 세게 불기 때문에 약한 휴대용 접이식 우산보다는 제대로 튼튼한 우산이 필요하다. 더불어 옆에 우비나 판쵸로 비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는 비장한 순례자가 있다면 왠지 민망해질수 있다는건 염두해 두도록 하자. 개인차가 많이 나는 아이템이로군.



그렇게 새삼 평생 써온 우산의 소중함을 깨닫고 비바람을 적절히 막으며 가다보니 어느새 100km 표지판에 도달하고 말았다.

100.000 km


아무리 오래걸려도 오일, 속도를 내면 나흘, 사흘에도 갈수 있는 거리.

이제 정말정말 며칠 안남았네.

의미있는 기념비(?)치고는 쫌 썰렁한 마을 길에 덩그러니 있네 그려.


나는 이 100km 지점에 나의 마지막 미련이자, 

레온까지 잘 썼던 나이키 acg 모자를 두고오기로 했다. 

사실 바람이 많이 부는 고장에서는 챙이 부드러운 모자는 큰 소용이 없었던듯 하다. 바람에 챙이 휘날려서 정신만 사납다. 하지만 그동안 고마웠어 모자야. 이제는 100키로 표지판의 아이템이 되어주렴.



여러가지 미련과 로망들을 싹 버린 나는 우산하나를 들고 홀가분하게 꽤나 긴 시간을 걸었다. 그리고 진입하는 다리가 동호대교마냥 길고 웅장한 (다리 건널 때 조금 무섭다) 멋진 마을 포르토마린에 다다랐다. 멀고 오랜 길이었지만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마을에서는 아마도 순례길 초반의 푸렌테 라 레이나이후로 처음으로 안톤 아저씨 부부를 마주쳤다. 너 킴이지? 맞아요 안톤 반가워요! 숙소를 막 찾아가는 분주한 길이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아서 짧은 인사만 하고 우리 산티아고에서 또 볼 거에요 하고 인사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후에 산티아고에서 안톤 내외와 마주칠 수가 없었다)


숙소 체크인하고 나와서 저녁으로 식당 테라스에서 피자를 먹고 있는데 마침 마을 구경하시던 이선생님과 분당 누님들도 마주쳤다. 흐흐 다들 멀리 못가고 이렇게 또 만나는군요. 오늘 아침에 사리아에서 출발하신다더니 이 마을에 와 계셨다. 내일 함께 걸어도 좋겠지만 저는 아마도 좀 더 멀리 갈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포르토마린 성당에서 소박한 순례자 미사를 듣고 조용한 숙소로 돌아와 하루를 마쳤다.

피곤한데 이상하게 상쾌한 기분. 

이정도 비쯤 거리쯤 이제는 괜찮다.

10월 20일 목요일 포르토마린

오늘 걸은 거리 약 37km

산티아고까지 약 93km

저녁 6시에 도착했으니 가장 늦게까지 걸어온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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