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둠녘에 출발해 열심히 걷다가 잠시 멈춘 바에서 콘레체에 빵을 아침으로 먹는다. 출발할 때 숙소에서 간단히 요기를 했으니 약 2시간 쯤 걸은 뒤 먹는 2차 아침(?)이다. 걷다가 살짝 지칠 때 쯤 반가운 바에서 카페인과 당을 충전해주는 것도 이제 거의 마지막이라니 좀 아쉽다.
산티아고까지는 지금처럼 걷는다면 이제 이틀 남았고, 나는 예상하지 않았던 막바지 러쉬를 하고 있었다. 여정의 끝 무렵이 되면 사리아에서부터는 여유롭게 하루에 20키로정도를 가볍게 걸으면서 지나온 길을 천천히 음미하려고 했는데 역시 인생은 계획되로 되지 않는다.
어제 카미노 베프 마커스랑 문자를 했는데 포르토마린이 아닌 그 다음 마을에 있었다. 곤자르라는 작은 마을인데 보통 경로상 포르토마린에서 많이 묵고 굳이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다. 왜 한 마을을 더 갈까 생각했더니 이녀석이 23일에 산티아고 도착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왜 굳이 이리 바쁘게 걸을까 물어봤더니 산티아고에 일요일에 도착해 12시에 진행되는 유명한 거대 향로 미사를 보고싶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24일에는 바로 도미닉이랑 피네스테레를 향해 출발할 예정이라고.
현재 내 위치와 페이스면 24일에 도착하는게 더 자연스럽기는 하다. 이선생님이랑 분당 누님들과 천천히 맞춰 가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남은 여정의 마지막 부분은 순례길에서 가장 많은 나날을 함께 했던 마커스랑 함께 걷고 싶었다.
더불어 순례길 초반 론세스바예스 동기(?) 채리사가 20일(어제) 산티아고 도착했는데, 산티아고서 23일 4시 비행기를 타야 해서 당일 12시 미사까지 보고 떠날 계획이라고 한다. 23일에 도착하면 언제 또 볼지 모르는 채리사나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향로미사는 보통 일요일에 많이 한다고 하는데 (돈내고 신청하면 해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것도 보고 싶고... 많은 미사 중 향로미사를 언제 하는지는 좀 랜덤이라고도 한다. 그래도 주말에는 확률이 높다고 한다.
여정의 모든 화살표가 23일 오전 도착을 가리키고 있었다.
23일에 도착하려면 여유를 잃게돼
24일에 도착하려면 친구들을 못봐
이건 구스에게 물어볼 것도 없다. 순례자는 화살표대로 가야지 어떻게 편한 것만 하고 사냐.
그래서 나는 그제 오세브레이로에서부터 산티아고까지 총 155 킬로미터의 거리, 보통 7일을 잡는 코스를 5일에 주파하게 되는 광속 급행열차에 그만 탑승해 버린 것이었다.
사람마다 걷는 이유와 기간은 모두 다르다.
모두 저마다의 방법이 있고 정답은 없을 게다.
많은 사람들이 순례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딱 100km를 채울 수 있는 도시 사리아에서 순례를 시작한다. 생장에서부터 먼 길을 출발한 순례자들은 나름의 자부심이 있어서 사리아부터 100km 걷는 순례자들을 내심 무시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다리가 불편해 짐도 없이 양손에 지팡이를 짚고 걷기도 한다. 그런 분들께 100km는 다른 이들의 800km보다 용기가 필요하고 힘든 여정일 수도 있다.
수레를 끌기도 하고,
가끔 택시를 타기도 하고,
매일매일 동키 짐배달을 보내기도 한다.
누구나 자신의 상황이 있고 그에 맞게 건강과 행복을 유지하는 선에서 감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걸으면 된다. 어쩌면 다들 긴 휴가를 온 건데 그것을 서로 비교하거나 등급을 매길 필요는 없을것 같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면 지금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마지막 일정은 어떤 것일까 며칠간 생각을 해봤다.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걸으면서 그냥 스며나왔다고 하는게 맞겠다.)
이제 나는 다른 것은 잘 모르겠고 남은 길을 지고 갈수 있을 만큼의 짐만 매고 씩씩하게 끝까지 걷고 싶었다. 순례의 갬성이라든지 잃어버린 자아라든지 뭐 등등은 메세타에서 무지개 보던 날까지 다 찾은 것도 같고,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경도 볼 만큼 본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친구랑 하루이틀 같이 걷다 여정의 끝에서 길에서 만난 사람들 얼굴 한번 더 보고 예쁘게 인사하는 정도다. (비야프랑카 용서의 문에서 순례 다 했다는 용서도 받았고?)
근데 그러려면 지금껏 한 적이 없는 빠른 페이스로 며칠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으니 참 여러모로 아이러니하다. 게다가 가까스로 할 수 있는 거리와 일정이라는 것도. 특히 오늘은 거의 이틀 거리를 가야 하네.
그래서... 뭐,
그냥 또 마냥 걸었습니다.
갈리시아의 구수한 흙길에서 닭도 보고
브랜든 아저씨랑 우연히 만난 식당서 세상 맛없는 햄버거도 먹고. ( 이 아저씨 참 우연히 잘 만남 )
마커스 기다려 길에서 따라잡을 줄 알았는데 왜 며칠째 한발짝 씩 더 가있니 웨얼알유 뽀르파보르?
나무... 담벼락에서 자라는걸까?
엄마랑 영상통화 하면서 가는데 길가의 개 한마리도 한 10분 가까이 나를 따라오며 응원을 해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