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여정은 막바지가 되었고 뜻하지 않게 마지막 5일 정도를 엄청난 페이스로 걷고 있다.
오늘도 33킬로 정도를 걸어야 하는 빡빡한 일정. 게다가 비가 계속 오고 있다.갈리시아의 날씨는 참 궂고 변화무쌍하다.
이제 판쵸는 대충 쓰고 주로 우산을 쓰며 걷는데 익숙해진 나는 비를 좀 맞더라도 신발까지 젖을 정도로 가고 싶지는 않았고, 마커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비가 적당히 오거나 잠깐 그칠 때 대차게 걸어 나가고 갑자기 소나기가 오면 바에 숨는 식의 전술적 무브먼트를 이어나갔다. 8시 좀 넘어서 출발했으니 출발도 빠르지 않았는데 중간중간 쉬어야 하니 시간 대비 거리가 잘 줄지 않는다. 비가 오지 않는 구간에는 계속 날랜 걸음으로 걸어야 한다.
중간에 쉬는 바에서는 진짜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콘레체와 토르티아도 먹어주었다. 매일 매일 질리게 먹었던 아침메뉴와도 곧 작별이라니 서운하다.
길에서 만나는 표지석에는 남은 거리가 40km대가 찍혀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오늘 밤에라도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이다. 정말 이제 다 왔구나.
그나저나 표지석의 저 ♡맥스와 벽에 써있는 마이클잭슨은 순례길 후반에 참 많이 보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길을 걸으면서 적은 것 같은데 정말 광기 넘치는 분들이 아닐수 없다. 순례길 2대 낙서 광인이랄까. 맥스 빌런과 마이클 잭슨 빌런.
일단 여기까지 비행기 타고 800km를 걸으러 온 것 부터가 나를 포함해 모두 약간은 특이한 사람들이다. 근데 그런 우리가 봐도 이 광기는 좀 굉장하군. 걷는 와중에 사람들이 계속 보는 표지석 화살표 중간에 사랑해 맥스를 적다니?! (아니면 최대로 사랑하자는 건가?) 또 남의 벽에다가 마이클잭슨과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 놓는 뜬금포는 무엇인가. 이분들을 이해하기엔 아직 나의 걷기가 모자란가 보다.
뭐 여튼.
우리는 비오면 쉬다가, 비 안오면 얼른 걸어서 다른 순례자 따라잡고, 또 좀 쉬다가, 또 따라잡고 이런 패턴의 고강도 육군 이인조 수색대 식의 택티컬 무브먼트를 이어갔다. (수색대 군생활 해본적 없음) 따라잡는 게 중요하진 않지만 날씨가 궂고 변화무쌍하니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짧고 마음도 살짝 조급하다.
대략 이런 느낌인데 간만에 말타는 사람도 보면서 잽싸게 걷다가
소도 보았다가
비가 또 내리치면 얼른 가까운 바에 뛰어 들어가서 수프 마시면서 몸 녹이고
또 진창길을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걷는 그런 패턴이었다. 나름대로 리드미컬하고 재미있는 면도 있다.
산티아고가 가까워 질 수록 길에 사람은 늘어나고 새로운 얼굴도 많아진다. 순례 인증을 받을 수 있는 100km 지점 사리아에서 출발해 총 5일 정도의 계획으로 시작하신 분들은 딱 보면 구분이 된다. 옷의 화사한 색깔이 살아있고 신발도 아직 깨끗하다. 그리고 뒷모습에서 발랄함과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한 즐거움이 느껴지지.
하지만 이제 생장에서부터 700키로를 넘게 온 우리의 옷은 색감이 메세타의 햇볕과 알베르게 건조기에 사라져 버렸으며 신발은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모를 무채색이 되었다. 다들 얼굴이 푸석하고 피곤에 쩔었는데, 막상 걸어가기 시작하면 왠지 모를 강렬한 눈빛과 묘한 미소를 띄고는 이제는 의식적으로 걷는다기 보다 다리가 알아서 앞으로 나아간다.
더불어 생장에서 출발한 사람들은 다들 이쯤 되면 다리든 발이든 물집이든 뭔가 문제가 하나씩은 있는데, 그런 와중에도 이미 평속은 빨라져서 깨끗한 차림의 사리아 뉴비분들은 부엔카미노 하면서 쓱 빠르게 지나쳐 버리는 그런 워킹머신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목적지에 갈 때까지 뿐이고, 목적지에 도착해 쓰레빠로 갈아신는 순간 다들 어기적 어기적대며 잘 못걷는 부상자로 돌아간다. 정말 신비한 일이 아닐수 없군!
100킬로를 걷는걷도 순례이고, 800키로를 걷는 걷도 순례다. 누구나 각자의 방식과 시간이 있고 강요하거나 무시하는건 매우 나쁜 태도다. 하지만 사리아 피플에게 훗 애송이들 이라는 마음이 드는 것조차 피할 수는 없는게 인지상정인가보다. (더불어 부질없는 순례자부심이 드는걸 보니 그만 걸을 때가 되었나보다)
근데 막판에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쯤 되면 지나온 길을 회상하면서 하루하루 줄어드는 게 아쉬워 중간에 쉬기도 많이 하고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고도 들었는데. 나는 왜 반대로 중간까지 한참 여유있게 오다가 마지막에 전력질주를 하게 된 것일까요.
일요일의 향로미사를 보고 싶고,
누군가와 함께 맞추어 걷고 싶고,
누군가 떠나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고.
아 다 욕심 때문이구나.
그래도 어쩌겠나 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인것을. 덕분에 이 후반에 전체 여정 중 가장 쌩쌩하고 홀가분하게 원없이 걷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목표가 선명해지니 오히려 버릴 것은 다 버리고 망설임 없이 갈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역시 인생은 선택과 포기의 연속인가 보다.
결국 우리는 오늘 이 비가 철철 오는날에 그대로 강행을 선택했고, 신발 안쪽이 젖지도 않은 채로 무사히 33km를 오는데 성공해 오페드로우조에 도착했다. 대신에 여정 막바지의 걷는 여유와 길의 즐거움은 포기했다. 하지만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면 일요일 점심 미사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저녁에는 미리 봐 둔 식당은 예약이 꽉차서 포기하고, 대신 선택한 다른 식당에서 그래도 매우 맛있는 철판 스테이크를 먹었다. 어제 내 생일이었다고 마커스가 쏴서 오늘은 내가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