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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수달 Dec 02. 2023

마침내 산티아고로

36일차, 오페드로우조에서 산티아고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사실 밝지는 않고 매우 깜깜했다.


요즘 해가 보통 8시 넘어서 뜨는데, 우리는 일요일 12시 홀리한 향로 미사에 도전하기 위해 오페드로우조에서 6시가 조금 넘어 출발하기로 했다. 길의 마지막 날 그동안 여정 중 가장 일찍 출발하게 되었네.


그나저나 스페인은 해뜨고 지는 시각과 실제 시간이 우리의 감각보다 2시간정도 느린 것 같다. 10월 하순인데 해가 8시 반에 뜰거면 우리로 치면 6시반이나 7시와 비슷하다. 대충 두시간 정도 늦는 감각. 식당 저녁도 보통 7,8시에 시작하는게 늘 불만이었는데 사실 여전히 매우 환하고 우리로 치면 5,6시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한국의 시간감으로는 새벽 4시가 조금 넘어 출발한 셈(?)



오늘 걸어갈 길은 거리도 길지 않고 큰 도시인 산티아고로 접어드는 길이다. 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늘 별로 유쾌하지 않다. 어둠속에서 씨끄러운 소리가 나는 공항 옆도 지나가야 했고, 계속 비가 내리고 있는데 중간 중간 폭우가 쏟아졌다. 여러 번 바에서 비를 피하야 했고 한번은 세상 장마처럼 내리부었다.


어제와 비슷하게 빠르게 걷고, 폭우가 올 때는 가까운 바를 찾아서 피하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걷다 보니 갑자기 또 소나기가 내려 잠깐 몇 분 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야 했다. 잠깐 기다리는 김에 문득 마커스에게 물어보았다.


그래서 너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뭔가 원하는 걸 얻은 것 같아?

글쎄... 나는 잠시 잃어버렸던 자신감을 찾은 것 같아. 너는?

음 나도 설명하기는 힘든데, 아마도 내려놓는 법을 좀 배운 것 같아.

소나기가 그치고 우리는 또 재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4일 전 사모스에는 보온병이랑 이것저것을 두고 왔다. 3일전 포르토마린 오는 길에서는 100킬로 표지석에 모자를 두고 왔다. 포르토마린 숙소에서는 실수로 바지에 이어폰을 넣은 채로 빨래를 해서 이어폰도 고장나 버렸다. 


어제 아침에는 멜리데의 멋진 알베르게에 소듕한 비상용 짜파게티 너구리도 두고 왔다. 짜파구리를 한번 해먹으면서 외국인들에게 이게 기생충의 그 라면이야 하고 싶었는데 결국 못해먹다니 조금 아쉽군. 현금 뽑은지 조금 되어서 지갑에는 10유로밖에 없고, 로그로뇨 데카트론서 산 장갑은 구멍이 났다.


내가 지닌 것은 이제 꼭 필요한 짐과 물과 약간의 간식. 많은 것들이 수명이 다하고 여분 따위는 없으며 딱 산티아고에 도착할 만큼만 남아있었다. (뭐 이제 20킬로밖에 안남았지만) 지닐 것만 지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홀가분했고 배낭을 지고도 양껏 속도를 내며 걸을 수 있었다. 허벅지며 종아리는 피로가 쌓여 뻐근하고 발목도 아직 조금 아프지만 발걸음은 엄청 가볍다.

오늘 비오는 어둠 속에서 걷던 도중 그동안 쓰고다니던 볼캡 모자를 안쓰고 가방끈에 끼어 놨는데, 그마저도 걷던 도중 어디엔가 떨어뜨렸다.


며칠째 비가 이렇게 온다며 마커스는 산티아고가 온힘을 다해 우리를 막는거 같다고 심기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나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어제 오늘 그 빗속을 걷는데 신발 속은 젖지 않고 잘 지켜내고 있었고 경치며 감흥이며 여유는 없지만 마지막에 그냥 힘껏 밀어붙이는 느낌.


열혈 로봇만화 같은걸 보면 막판에 로봇이 팔다리가 다 뽀개지면서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해서, 주인공이 로봇에서 뛰어내려 간신히 우주멸망을 막는 버튼을 누른다든지 하는 클리셰가 있는데 약간 그 느낌이랑 비슷했다. (하지만 내 다리는 뽀개지면 안된다.)


10키로정도 남은 지점 폭우가 잠시 그친 바에서 마지막으로 다이소 판초를 버려버리고, (좀 섣불렀다. 그다음 바에서 버렸어야 함) 어제처럼 큰 비는 피하면서 빠르게 가는 전술적 무브먼트를 계속 하다 보니 점점 시내로 접어들었다.



시내로 접어들면서 저 멀리 성당 꼭대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배낭을 맨 사람들이 줄줄이 가는 방향도 보였다. 도심으로 진입할 수록 길은 복잡해졌고 사람도 많아져 정신이 좀 없다. 골목은 혼잡하고 어디선가 스코틀랜드 파이프 소리가 들린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고 도심 여기저기며 광장에는 일요일이라 온갖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그렇게 미사가 시작하기 전인 11시 반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돌아 성당 뒷편으로부터 돌아서 산티아고 성당 광장 앞에 도착했다.

드디어 다 왔구나.


도착하자 마자의 감흥은 다소 어리버리하고 미사 들어갈 생각에 마음이 좀 바빴으며, 광장은 비도 오는데다가 사람들이 많아서 우리를 기다릴 친구들을 찾을 여유도 없었다. 성당 앞에 진입하며 누군가 아는 얼굴을 만나 감격의 포옹을 할 줄 알았건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어떤 축일인지 몰라도 단체 관광객들도 가득했고 오늘따라 성당 앞은 너무 시장통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걸어온 산티아고 대성당은 순례자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엄청나게 크고 유명한 건축물이자 무척 붐비는 관광지였던 것이다. 나는 오늘 또 도착하는 수많은 순례자 중 한명이었다.


이 도시는 어 또왔니? 하는 표정과 풍경으로 무덤덤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생각보다 일상적인 도시의 풍경과 덤덤한 입장. 그리고 오늘따라 무척 안좋은 날씨로 그야말로 나의 도착은 드라마틱한 감흥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라 이게 맞나 싶기도 하다.


뭐 인생이 그런거지.

그래도 막판에 하얗게 불태웠다.

폭우가 내리는 와중에 미사시간 전에 도착하는 것도 성공했다.

해냈다구요 산티아고!


2022년 10월 23일 일요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오늘 걸은 거리 20km

그동안 온 거리 약 790km

산티아고까지 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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