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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수달 Nov 12. 2023

안개를 뚫고 철십자가에 고향의 소원을 놓다

29일차, 라바날에서 철의십자가


오늘은 카미노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은 원래 용서의 언덕인줄 알았으나 이거라고 한다) 철십자가를 지나는 날이다. 해발 1150 고도에 있는 라바날에서 출발해 1500고지 철십자 언덕을 지나 550 고도쯤 되는 폰페라다로 내려오는 그런 코스다. 이선생님과 함께 출발했다.


시작부터 안개가 자욱하다. 그동안 날씨 운이 썩 좋았으니 안개가 있는날도 있겠지. 한시간 여를 걸어 폰세바돈을 지나던 중 자욱한 안개 속 한복판에 댕댕이 한마리가 엎드려 있었다. 추운데 왜 하필 여기 엎드려 있는거니 너의 심리도 오늘의 날씨처럼 의뭉스럽구나. 생각보다 쌀쌀한 날씨에 이선생님과 함께 폰세바돈의 바에서 잠시 쉬면서 몸을 녹였다.



바를 나와 폰세바돈 마을을 지나쳐 한 10분 여 걸어 올라오는데 드라마틱하게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계속 완만하게 고도를 높여 올라왔으니 구름을 뚫고 지나온지도 모르겠다.



10여년 전 혼자 며칠간 제주도 여행할 때 한라산을 올라간 적이 있었다. 시작부터 비가 내려 줄창 비를 맞으면서 올라다가다 산 중턱의 구름을 뚫고 올라가니 갑자기 쾌청한 하늘을 마주했었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하... 그게 벌써 10년이라니 그 동안 뭐했니 철도 못 들고.


구름을 지나온 뒤 뒤돌아보니 그곳엔 아름다운 운해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폰세바돈을 동트기 전 일찍 지나면 멋진 일출을 볼수 있다고 들었었지. 우리는 비록 일출 시간은 놓쳤으나 기막힌 아침의 운해를 볼 수 있었다.



요즘은 카미노라 못 보고 있지만 한국에서 구독하던 유튜브 채널에서 채널 주인장이 항상 최상의 맛 표현을 세상 아재처럼 캬.... 크.... 로 하시는데 딱 그 느낌이다.


구름 모양새도 UFO닮은게 신기하고 기가 맥히죠. 크으...



그렇게 기대도 못했던 멋진 날씨와 장관 절경 신이 주신 선물에 감탄하다보니 어느새 금방 철십자가에 다다랐다.


철십자가는 내가 걷고 있는 카미노 프랑스길을 통틀어 가장 높은 고도에 있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 로마 시대에는  자리에 자칼을 제물로 바치는 제단이 있었다는데, 이후 중세에 기독교 풍습으로 바뀌면서 제물 대신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봉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은 순례자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돌멩이에 소원을 적어서 철십자가 언덕에 놓아둔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산티아고 공부를 많이 안했기에 그 사실을 며칠 전에 알았고... 남들은 다 있는 고향의 돌멩이도 당연히 없었다. (돌은 없고 고향의 대용량 라면수프는 아직 뜯지도 않고 있었다)


고민하다 돌멩이 대신 고향에서 가져온 것 중 가장 소중..까진 모르겠으나 럭셔리하달까 하게 지켜왔던 것을 여기에 두고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라면수프는 아니다. 일단 돌과 라면스프는 물성이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고향에서 온 돌무더기의 언덕 위에


그동안 순례중 가끔 소박한 호사인 티타임이나 즉석국 타임을 선사해주던 티타늄컵을 두고 가기로 했다.


돌멩이도 티타늄도 모두 광물의 일종일테니 한국에서 가져온 것 중 가장 돌에 가깝기도 해 보이고, 생각보다 몇 번 안 쓰면서 소중히 모셔 왔으니 돌멩이라고 생각하면 돌멩이인 것이 아닐까?


티타늄 컵에 글씨를 쓸 방법은 없었기에 소원은 아침에 미리 사하군 순례자미사에서 뽑기로 받았던 성경구절 뒷면에 적어 두었었다. 스페인어로 Por Favor (영어로 치면 Please) 도 한구석에 적어 놓았다. 종이는 컵 안에 넣고 날아가지 말라고 현장의 작은 돌로 눌러서 철십자가 돌무더기 사이에 놓아 두었다.



종교가 있지는 않지만 카미노를 걸으면서 작은 예배당이나 성당을 들를 때면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엄마의 몸이 활력을 되찾고 마음은 평화를 되찾게 해 주시고 제가 산티아고 길을 무사히 걷게 해주세요 와 같은 기도를 했었었다. 걷다 보니 장황한 기도는 언젠가부턴가 조금씩 짧아져 그냥 딱 하나의 단순한 단어가 되었다.

엄마 건강. 지금 여기에 놓아둘 소원이 있다면 그저 그것 하나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순례자 미사에서 뽑았던 요한복음 10장 11절은 비록 소원 적는 뒷면으로 사용되어 버렸지만 꼭 기억해 둘게요 사하군의 이름모를 신부님.


10월 16일 일요일 철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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