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나서 보니 먹은 이야기

3일차,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

by 걷는수달

오늘은 론세스바예스에서 출발해 수비리까지 갔다.

총 길이는 약 21키로 정도인데, 시작고도 900미터정도에서 500키로까지 전체적으로 낮아지는 코스다. 마을길과 산길이 번갈아 나오면서 완만히 무난할 줄 알았으나, 예상보다 오르막도 많고 풍경도 다소 심심했다. 어제 피레네 길이 첨부터 너무 뷰가 훌륭해서 기대치를 올려버린 듯도 하다. 그래도 여정 초반에 있던 바에서 먹은 초코렛빵이랑 콘레체가 한줄기 낙이랄까. 새벽에 론세스바예스에서 아직 어두울 때 출발하여 걷던 중 저 앞에 따뜻한 불빛이 켜진 가게가 보여 가까이 가보니 아침일찍 문을 연 바였다. 처음 만난 바에서 스페인 스타일의 진한 카페라떼라고 할 수 있는 콘레체와 빵을 주문해 먹었는데 초콜렛 빵이 너무너무 맛있었다. 달콤한 빵을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아침부터 빈속에 걸어서 그랬나?

순례길에는 길 중간중간에 커피와 간단한 음식을 먹으며 쉬어갈 수 있는 바(bar) 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고 들었다. 오늘 아침 기똥찬 초코렛 빵을 먹은 바가 카미노 첫번째 바였다니 매우 흐뭇하군.



목적지인 수비리에 도달하기 전 마지막 3,4킬로는 산길 내리막이었는데 경사도 꽤 험하고 자갈도 많아서 꽤나 힘들었다. 어제 길보다 더 어려운 느낌. 지루하기도 하고 종종 힘도 빠져서 모래자갈에 종종 미끄러졌는데, 아침에 론세스바예스 수도원서 아날로그 자판기에서 뽑은 젤리캔으로 당보충 못했으면 클날 뻔 했다.

역시 론세스바예스의 아날로그 자판기는 쏘럽 더럽 그라시아스.



아슬한 내리막길을 지나 수비리에 도착했다. 수비리는 Zubiri라고 쓰는데 수라고 해야할지 주라고 해야할지 매우 헷갈리는 곳이지만 전체적인 정황상 "수"가 맞는 듯 하다. 마을 초입에 예쁜 다리가 맞아주고 아래 계곡물이 살살 흐르는 엄청 작은 시골마을. 식당이 2개밖에 안되고 마트도 두어 개가 전부다.


여기 엘에이갈비 맛집이 있다는 소식을 우박사가 한국에서 유튜브를 보고 전해주었다. 물어보니 가게 이름이 바 발렌티노라고 한다. 체크인을 얼른 하고 구글맵으로 검색하여 점심 먹으러 가봤다. 메뉴판에 마침 스페셜 메뉴로 비프립이 떡하니 있었다. 아 바로 이거구나 싶어 바로 주문했다. 결과는.. 절반의 실패 또는 성공? 갈비가 나오긴 나왔는데 LA가 아니라 뜻밖의 거대 왕갈비였다. 엄청 헤비했다. 고기는 부드럽고 맛나더라. 밥이랑 김치나 우거지반찬만 있었으면 완벽했을텐데.



짐정리를 하고 빨래를 하고 마을구경도 좀 하다가 저녁은 가방에 품어온 짜슐랭을 해먹기로 했다. 알베르게에 아쉽게도 부엌이 제대로 없다. 가스레인지도 없고 멀쩡한 사발도 없고 쓸 수 있는건 전자렌지와 커피포트와 전기 계란삶기기계 뿐. 과연 할수 있을까 싶었는데, 찬장에서 최대한 움푹한 접시를 꺼내 뜨거운 물을 최대한 붓고 라면을 4등분해서 뽀개넣은 뒤 한 6분정도 중간에 한번씩 풀어주면서 전자렌지에 돌려봤다. 어 의외로 이게 되네?! 영양 균형을 위해 계란도 두개 찌고 배낭안의 있던 비장의 건조 된장국까지 함께해서 매우 나이스하게 저녁을 해결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된장국이 되는 마법같은 녀석이다. 짜슐랭도 괜찮았지만 인스턴트 건조 된장국 너무나 고향의 맛이야 ㅜ.ㅠ 너무 잘가져왔드아... 겨우 며칠만에 고국의 맛이 이렇게도 그리워지다니.



왠지 요리 자신감 및 의욕이 생긴 김에 내일 가면서 먹을 샌드위치까지 만들어버렸는데, 슈퍼에서 빵이랑 치즈랑 파테(?) 통조림 사다가 생장에서 사온 비장의 머스타드 소스를 첨가하여 뚝딱 만들었다. 파테 통조림은 고기를 갈아서 만든 것으로 일종의 샌드위치에 바르는 스프레드같은거라는데, 맛은 장조림햄과 순대간을 섞은 것 같은 맛이 난다.



그나저나 스페인 슈퍼는 너무 신난다. 각종 하몽같은게 2유로에서 5유로면 되고, 치즈랑 신기한 피클같은것도 가득하다. 사실 오늘 샌드위치를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파테가 뭔지 궁금하여 그만 사버린 김에 만들고 말았다.

아직도 배가 부른데 과연 이길의 끝에서 나는 살이 빠질까 궁금하다.


9월 20일 화요일 수비리

오늘 걸은 길 21킬로미터

남은 길 약 740킬로미터



이전 04화나폴레옹 코스로 피레네 산맥을 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