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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은 죽음인가

이배 작가의 작품을 보며

by 숟가락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물리학자가 생명에 대한 정의 자체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할 때 그 경계가 매우 명확하지 않아 무엇이 생물이고 무생물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무가, 풀이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흙은? 물은? 바람은? 생명이 없는 것일까? 있는 것일까?


숯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숯은 죽음이다. 나무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덩어리일 뿐이다. 숨 쉬고, 율동하던 생명체였던 나무가 불에 타고 남은 덩어리. 하지만 정말 숯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숯은 숨을 쉬지 않는다고, 율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숯은 숨을 쉬고, 다시 불이 붙고, 다른 생명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그림이 된다. 그러니 죽음이라 할 수 없다.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생명이다.


내 그림은 주로 목탄 연필을 사용해서 그려진다. 숯을 가공한 연필이다. 다른 재료도 접하지만 이만큼 나에게 매력적인 재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알록달록한 그림을 그려볼까 싶다가도, 목탄 연필을 손에 쥐면 무심히 가라앉는 내 마음이 좋아, 색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지 않는 무게감이 좋아, 다시 돌아가게 된다. 마음이 너무나도 가벼워 하도 펄럭거리니까, 색에라도 홀리고 싶지 않은 걸까?


서걱거리는 질감, 문지를 때 종이와 손바닥 사이에서 방황하다 자리 잡는 숯가루들의 속삭임이 좋다. 손톱 사이에 끼어 빠지지 않는 검은 때가 나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죽음으로서 다시 생명을 얻는 숯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던 죽음에서 무언가를 하는 나로 살아지게 만든다.
이런 내 마음을 누가 이해해 줄까 싶었는데 고맙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한국 현대 미술계의 거장 '이배' 작가다.


이배 작가가 처음 숯으로 작업을 시작하고 주목을 받은 곳은 프랑스였다. 89년 파리로 이주해서 활동을 시작할 무렵, 생각보다 높은 프랑스 물가에 유화물감을 사기 쉽지 않았다고 한다. 유화 작업을 지속하기 어려워 고민하던 그에게 시장에서 숯불용 숯이 눈에 띄게 되면서 그의 숯 작품이 시작되었다. 숯가루와 아크릴 미디엄을 혼합하여 시작한 미디엄 작업, 숯가루를 물과 섞어 신체성을 표현하는 붓질 시리즈, 숯 그 자체를 활용한 평면과 입체작업인 '불로부터'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이배 작가는 나무가 타고 남은 탄소 덩어리인 숯이 소멸 후 재탄생하는 생명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화두는 순환과 환원이다. 소멸되어 버린 재와 생성하는 불의 반복이 영원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작품에 담고 있다. 또 숯이 가지고 있는 검은색을 모든 색을 포용하는 색이며, 동시에 빛을 머금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 '불로부터' 시리즈의 평면 작업은 숯을 납작하게 잘라 조각조각을 화폭에 붙인 뒤 사포로 갈아서 광이 나게 만들었다. 반짝이는 숯의 빛을 통해 검은색은 어두움이라는 고정관념에 반하는 작품이다. 영어의 black과 프랑스어 blanc은 흑과 백이라는 정반대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어원은 같다고 한다. 불타다, 빛나다는 뜻의 인도-유럽어근 'bhleg-'에서 유래했다. 어두우면서도 빛나는 이배 작가의 작품처럼 결국 흑과 백, 삶과 죽음은 모두 한 뿌리이고 그 경계는 없다는 의미처럼 와 닿는다.


한평생 숯으로 작업을 해온 작가는 재료의 변화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그는 숯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아직 다 표현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모르고 보면 그저 검은색, 어두움뿐이지만 그 안에 담은 생명과 끝없는 순환의 원리를 작가는 아직도 계속 탐구하고 표현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달집 태우기 같은 대형 프로젝트와 숯이 타오르는 장면을 담은 영상, 숯의 형상을 그대로 본뜬 브론즈 작업으로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지만 작가가 다루고 있는 숯에 대한 본질적인 탐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작가로서의 성공이 더 큰 프로젝트로 자신의 철학을 펼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는 점이 참 부럽다.


계속해서 한계를 넘어서는 고령의 작가들을 알게 될 때마다 내가 가진 현재의 젊음이 낭비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아끼지 말고 써야 한다. 죽으면 재가 될 몸뚱이. 때 없이 깨끗하게 가지고 가서 무엇을 하겠나. 이리저리 막 굴리고, 경험하고, 느끼며 내 영혼에 밥을 듬뿍 주자. 그렇게 활활 타는 재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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