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은 없다

빨리 망치세요, 빨리 고치게

by 숟가락

그림을 좋아하고 그리다가 이제는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사실 가르친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부끄럽다. 누굴 가르칠 만큼 아주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부끄러운 실력에도 불구하고 가르치는 길에 나서는 건 필요한 도움을 줄 수는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덕분이다.


흰 도화지를 마주한 순간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안다. 틀릴까 봐 걱정되어 손 데지 못하는 마음. 자꾸 다른 이들의 그림과 비교되어 주눅 드는 마음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림을 그리려 이젤 앞에 앉는 용기도 안다. 모두 내가 겪은 마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끄러우면서도 떳떳하게 '선생님'이란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서고, 가르친다. "빨리 망치세요. 빨리 고치게."라고 조언하며.


그림을 망치라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사람들이 그림을 못 그리는 이유는 망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보는 눈은 있다. 어떤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고, 못 그린 그림인지 아무리 그림에 까막눈이라도 명확하게 안다. 그래서 내가 그린 그림이 잘 그린 그림이길 바라고, 못 그릴 바에야 안 그리는 게 낫다 싶어진다. 다른 사람들이 내 그림을 어떻게 볼지 뻔히 아니 말이다. 그들도 보는 눈은 있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망칠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내가 그리는 이 그림은 망칠 게 뻔하다. 세상에는 나보다 잘 그리는 사람이 하늘의 별만큼 많으니까. 아무리 잘 그려도 좋은 평가를 받는 일은 쉽지 않다. 나 스스로에게 조차도.


그런데도 왜 그려야 하냐고? 당신은 정말 그리고 싶으니까. 더 잘 그리고 싶고. 그러니 계속 망쳐야 한다. 그래야 다음 그림은 덜 망치기 때문이다.


당신의 두 번째 그림은 첫 번째 그림보다는 조금 나을 것이고, 다음 그림은 지금 그림보다 나을 것이 분명하다. 세상의 잣대와 비교하면 한없이 초라할 수 있지만, 어제의 나와 비교하면 기특해진다. 그러니 계속 그려야 한다. 그래야 내일의 내가 더 좋아질 수 있다.


"못 그리는 사람은 없어요. 안 그리는 사람이 있는 거지."라고도 자주 말한다. 빨리 망치라는 말과 통하는 문장이다. 당신이 지금 그림을 못 그리는 이유는 안 그려서이다. 그림을 그리고, 망치기를 반복하면 어쩔 수 없이 잘 그리게 된다. 그러니 당신은 그림을 못 그리는 게 아니라 안 그리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고 믿는다. 못 하는 사람은 없다. 안 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그림도, 글도, 운동도, 춤도, 노래도, 세상살이도. 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어제의 나보다는 잘하게 된다.


망친 게 있어야, 고칠 게 있고, 더 나아질 수 있다. 아무것도 망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고칠 수 없고, 남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주 강의에서도 이렇게 외칠 예정이다.


"빨리 망치세요, 빨리 고치게. 그래야 그리는 사람으로 살 수 있어요. "

keyword
이전 05화목적 없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