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아침 출근길에서 매번 동네 골목길 초입에서 한 할머니를 만나곤 한다. 그분이 계시지 않으면 혹시나 건강에 무슨 일이 있으신가 걱정될 정도로, 그 길을 지나갈 때마다 할머니는 늘 거기에 계신다.
할머니는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항상 젊은 청년이나 내 또래의 아가씨들이 지나가면 우리 손주 혹은 손녀를 닮았다며 참 예쁘다고 하신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리 할머니가 생각난다.
우리 할머니는 만주에서 태어나셨다. 명절 때 얼핏 들었던 이야기론 할머니의 부모님이셨던 진외증조 할아버지와 진외증조 할머니가 당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이주하셨다고 했다. 거기서 할머니를 낳았으나, 외동딸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 모두 돌아가셨고 그렇게 친척집에서 지내느라 한국으로 돌아왔던 할머니는 열여덟 나이에 서른 살이었던 우리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시게 되었다고 들었다.
할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이셨던 큰 할머니는 큰아버지를 낳으시고 얼마 뒤에 돌아가셨고, 우리 할머니는 재취 자리로 들어오시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어린 나이에 들었음에도 할머니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었던 것 같다. 띠동갑 신랑에, 나이 차이가 그리 나지 않은 첫째 아들 그리고 힘들어도 하소연하며 기댈 수 있는 친정 부모도 없으셨던 할머니.
만주에서 태어나 처음엔 부모님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엔 친척분들을 따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우리 할머니는 중국어와 일본어, 러시아어까지 익히셨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학교를 다니지 못해 글을 쓰지는 못했으나, 아버지 말로는 중국집에서 중국인 주방장과도 능숙하게 중국어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할머니는 참 재능이 많은 여성이었다.
연민의 감정을 품었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할머니와 그리 친하지 않았던 손녀였다. 할머니는 아들만 5형제를 낳으셨는데도 며느리들에게 늘 아들을 낳으라 하시던 옛날 분 중의 옛날 분이었다. 나만 보면, '외동딸이라 외롭지 않냐면서 엄마에게 남동생 하나만 낳아주세요'라고 해보라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하셨고, 나는 은연중에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엄마의 얼굴을 보며 할머니를 마음속에서 밀어냈다.
매년 명절 때 제사를 지내러 친가에 내려가면, 할머니는 허리가 굽으며 키가 한 뼘씩 작아져 있었고 하루가 다르게 노인의 모습으로 변해가셨다. 할머니와의 만남에서 늘 나는 보이지 않는 감정선을 넘지 않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할머니의 하나뿐인 친손녀로서 역할을 다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십몇 년 뒤,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3학년일 때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날은 원래 부모님과 할머니를 뵈러 가기로 한 날이었으나 그날따라 비가 많이 와서 그다음 날로 일정을 미뤘었다. 그러나 결국 그다음 날 할머니는 갑작스레 돌아가셨고, 가족 누구도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로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에게 나를 많이 찾으셨다고 들었다. 친손녀가 보고 싶다고 하셨던 할머니. 어쩌면 친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 나뿐이지 않았을까. 사실 한 번도 다른 남자 사촌 형제들과 차별한 적이 없었는데, 오히려 여자라고 늘 맛있는 것도 용돈도 먼저 챙겨주셨던 것 같은데. 나는 왜 할머니의 진심을 알지 못했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먹먹한 감정이 밀려온다.
할머니의 사진 한 장 내가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휴대폰으로 풍경 사진만 많이 찍을 줄 알지 할머니 사진 하나 찍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 부끄럽다.
할머니가 부디 다음 생에는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실 수 있길 바라며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