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바야흐로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가던 시절.
당시 다니던 네덜란드 학교는 1년에 방학이 4번이나 있었는데, 그중 크리스마스 전과 후에 걸쳐진 겨울방학이 가장 길었다. 12월 말부터 약 3주간 학교 수업은 숙제로 대체되어 유럽 출신 친구들은 하나둘씩 고향으로 떠났다. 숙제부터 다하고 움직이자 마음먹었을 때, 가족들을 만나러 스페인으로 간 친구가 SNS에 올린 사진 한 장에 이끌려 바르셀로나 티켓을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진 속 바르셀로나는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12월의 네덜란드는 매일 구름과 안개로 밝은 날을 즐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 전기장판 없이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그런 내게, 남부 유럽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바르셀로나의 어느 광장에서 얇은 차림의 사람들이 어울려 노는 모습은, 스페인에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다. 그렇게 나는 바르셀로나에 갔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SNS에 올렸었던 그 광장으로 향했다. 바르셀로나의 모습은 다른 유럽 국가의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따뜻한 날씨 때문에 겹겹이 입었던 패딩은 벗고 배가 고파 공항 내 편의점에 들렸을 때 생각보다 저렴한 물가에 놀랐다. 네덜란드도 나름 식료품이나 식자재는 유럽 국가 중에서도 독일 다음으로 저렴하다 생각했었는데, 당시 스페인의 물가는 네덜란드의 60~7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교통비도 저렴했고 무엇보다 바르셀로나 시내에 위치한 호스텔들이 다 예쁜 데다가 가격이 매력적이어서 이곳에 참 잘 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스페인 사람은 정말 너무나도 친절했다.
평소 여행을 다니면서 인복 하나는 자신 있다 자부했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거기에다가 운도 더해져 소매치기 하나 없이 현지인들 혹은 외국인들이 베푸는 호의 덕에 길을 잃지 않고 잘 찾아다닐 수 있었다. 아마도 당시 IS로 인해 경비가 삼엄해져서 그런 탓도 있겠지만 이곳저곳을 누비면서도 이번 여행은 굉장히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가우디 성당에 들렸을 때, 부디 이 여행이 성공적이길 빌었었다. 그런데 여행은 변수의 연속이라더니.
내가 스페인 친구들과 살면서 깨달은 몇 가지를 간과했던 사실이, 과장을 약간 보태 나의 발목을 잡았다.
스페인에는 '시에스타'라는 낮잠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
스페인은 보통 점심은 2시~4시 사이에 먹고, 저녁은 대부분 8시~9시 이후에 먹기 '시작'한다는 것.
5명의 스페인 친구들이 한 집에 같이 살았는데, (당시 우리 플랫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 17명이 함께 살았었다. 그중 몇은 함께 사는 친구들의 애인이나 학교 친구들이었고.) 시에스타 시간이면 늘 거실에서 낮잠을 자곤 했다. 이때 친구들이 깨지 않도록 거실에서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았는데, 가끔 그 친구들을 보며 "쟤네는 잠이 왜 저렇게 많을까" 지나가며 생각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항상 나를 포함한 한국인 친구들이 6~7시쯤 저녁을 만들어 8시까지 먹곤 했는데, 늦게까지 시에스타를 즐기다 장을 봐온 스페인 친구들이 그때부터 요리를 시작해서 부엌은 늘 늦은 밤까지 붐비곤 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니 이 모든 것들이 여행 일정을 변경하는 변수가 되었다.
큰 맘먹고 엄마에게 부탁해 한국에서 택배로 받았던 가이드북을 보며 바르셀로나 여행 일정을 짜 왔는데, 가는 곳마다 시에스타 시간이 걸려 상점 앞 카페에서 상점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심지어는 시에스타 시간보다 약 5분 먼저 도착했음에도 지금부터 휴식시간을 준비해야 한다는 점원의 말 한마디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가게를 나와야 했다.
시에스타 때 상점에 도착해 남은 시간을 공원에서 때웠던 그때 내 배꼽시계는 늘 정확히 낮 12시와 저녁 6시에 울려댔지만, 그 시간에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은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식당밖에 없었다.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식당을 가고 싶었지만, 영업시간이 철저히 스페인 사람들의 생활패턴에 맞춰져 있어 그곳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선 관광시간 혹은 취침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여행자 커뮤니티에서 만난 어느 동행 분과 간신히 8시에 저녁 먹은 흔적. 내 인생 빠에야. '그래도 바르셀로나까지 왔는데, 타파스(일종의 에피타이저로, 와인과 곁들여 먹는다.) 바에는 꼭 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낮에는 '보케리아(바르셀로나 메인 마켓) 시장'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평생 먹을 군것질거리를 그때 '보케리아'시장에서 다 즐긴 듯 우연히 만난 한국분들과 보케리아 시장 근처에서 먹은 랍스터. 인당 30유로였던 것 같은데, 그 맛은 잊지 못한다. 혼자는 가기 싫어 어떻게든 동행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밤 10시에 타파스 바에 가서 저녁 겸 맥주를 함께 마실 정도로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용기 내 혼자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퀴멧 & 퀴멧' 타파스에 바에 들려 가이드북에 있던 새우 타파스와 하이네켄 한잔을 주문했다.
'퀴멧 & 퀴멧'바의 모습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현지인으로 보이는 한 중년 부부와 합석을 하게 되었다. 앉을만한 자리를 찾고 있던 내게 이리로 와도 된다고 손짓했던 분들. 내가 시킨 타파스가 나올 무렵 그분들이 내게 바르셀로나 여행에 대한 소감을 물어봤다. 참고로 그들은 스페인 사람들은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과감히 깨부순 분들이었다.(당시 부족했던 내 영어를 받아주신 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진짜 좋아요라고 시작했다가, [그런데]로 이어나간 말.
쇼핑할 때, 시에스타 때문에 가끔씩
상점 문을 닫으니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요.
저녁 영업시간이 늦어 현지인들이 찾는 식당을
많이 가보지 못한 게 아쉽네요.
늦게 식사하면 불편하진 않으세요?
그들은 웃으며 내게 이런 말들을 해줬다.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는 있는데,
점원들도 충분히 쉴 수 있고 시에스타 덕분에
오히려 더 기운 내 일할 수 있는 걸.
저녁시간이 너무 이르면 가족들과 여유롭게 마주앉아 저녁도 못 먹을 수도 있어서 저녁시간이 늦을수록 더 좋다고 생각해~
스페인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을수록 오랜 시간 내재화된 그들의 '여유로움'이 부러워졌다. 대학생일 때 조차도 '빨리빨리'에 익숙해져 있던 나였고, 무언가를 천천히 오랫동안 음미하며 먹거나 즐기는 것에 대해 대다수의 한국인이라면 그렇듯 익숙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스페인의 여유로운 모습이 좋으면서도 약간 '이 절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았다.
20분을 기다려 받은 나의 타파스와 맥주 한잔 타파스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 12시가 가까워져서야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 밤 중에 감성이 폭발했는지, 당시 쓰던 다이어리에 그날의 감상문을 짧게 적어놨었는데 지금 읽어보니 참 부끄러운 말들의 연속이네.
'나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여유롭게 살 거야'로 끝낸 그날의 감상문.
나는 지금 과연 여유롭게 살고 있는 것인지, 충분히 현재의 삶을 즐기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없다면, 정답은 'No'라는 거겠지. 이야기를 쓰면서도 그때 먹었던 타파스와 페이스북 친구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부부와 신나게 떠들었던 그 시간이 떠오른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20대 초반의 내가 경험한 바르셀로나의 어느 낮의 풍경 여유가 없는 삶이라 해도, 여유를 만들기 위해 노력은 해봐야지. 남는 시간을 쪼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하거나 바쁜 일상 속에서도 휴식을 찾아 즐겨야지. 어제의 추억으로 오늘의 나를 반성하고 내일의 나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