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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수돌 Mar 22. 2020

런던, 가난한 나에게 참 따스했던 곳

힘듦의 끝에서, 런던의 위로

네덜란드 교환학생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는 일 년에 방학이 총 4번 있었다. 

할로윈데이를 앞두고 약 2주일 정도 짧게 가지는 Mid-term break 도 그중 하나였는데, 유럽인 친구들은 모두 그 기간을 이용해 고향에 다녀왔다. 한국은 잠시 다녀오기란 너무 먼 나라였고, 때마침 내가 살던 곳 근처에 아인트호벤 공항이 있었는데 라이언에어 특가로 런던 티켓이 100유로도 채 되지 않아 갑자기 런던 여행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 훌쩍 영국으로 일주일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놓고는 한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으로 바쁘게 길을 나섰다. 

대한민국을 벗어나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처럼 나는 한걸음에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백남준 선생님의 작품을 보러 달려갔다. 현대미술의 난해함 앞에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지만, 백남준 선생님의 작품이 전시된 층에 사람들이 붐비는 것만 봐도 그의 작품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이 되더라. 역시 런던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작품 감상 후에도 하루 종일 돌아다녔다. 


여행할 때만 해도 학생이라는 신분 덕분에 유럽 대부분의 미술관과 박물관이 공짜였다. 

백남준 선생님의 미술관도 덕분에 돈을 지불하지 않고 들어간 기억이 난다. 그러나 차비는 아니었다. 특히 영국 물가는 정말 살인적이었고 교통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버스를 탔다간 혹시나 잘못된 곳으로 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무조건 지하철만 이용했었는데 그마저도 돈을 아끼고자 걸어 다니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나는 런던 여행 내내 하루에 거의 4~8km 되는 거리를 걸어 다녔고, 구글 맵에 다음 목적지를 검색했을 때 1km 정도면 '얼마 안 걸어도 되겠네'하고 생각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런던 여행 중 시간의 반을 걸어 다니는 데 쓰거나, 싼 식당을 찾느라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지어 저렴한 식당들도 팁까지 포함해 기본 인당 20~30불 정도는 나갈 것 같아서 여행을 끝마칠 무렵에는 식당 대신 샌드위치 가게나 편의점에 들려 간단하게 요기를 때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행의 팔 할이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인데... 그 시절로 돌아가 돈이 없던 내게 맛있는 한 끼를 대접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대신 걸어 다니면서 남들이 볼 수 없는 곳들을 눈에 담았다. 

관광지에서 약간 벗어났을 뿐인데 평범한 일상들이 담긴 곳들이 펼쳐져 나도 모르게 여행자가 아닌 척하게 된 곳들. 그 거리를 걸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참 꿈만 같다.

런던 어느 거리에서


그렇게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던 여행 끝 무렵.

환전한 돈은 거의 다 떨어진 상태에서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한번 더 다녀오기로 했다. 백남준 선생님의 작품을 다시 감상하고 돌아오는 길에 배가 너무 고파 근처 [프레타망제] 라는 프랜차이즈 샌드위치 가게에 들렸다. 여러 종류 중에서 가장 저렴한 샌드위치와 참치 샌드위치를 두고 십분 넘게 고르고 골라 저렴한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계산하려 했을 때, 내가 신중하게 고르던 모습을 지켜보던 점원이 나에게 [할로윈선물]이라며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샌드위치 하나도 마음 놓고 사 먹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며 불쌍했던 걸까.

낯선 외국인 앞에서 눈물이 왈칵 났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무례한 말투였겠지만, 괜찮다고 돈을 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점원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네가 불쌍한 것이 아니고 진짜 할로윈데이 선물인걸. 영국에서 좋은 시간 보내!

그 순간 영국 여행 내내 걸어 다니며 돈 아끼느라 고생한 내게 영국이 주는 작은 선물이 아닐까 싶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게를 나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내가 싫어하던 오이였건만 정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맛. 나는 그날 영국인으로부터 따스한 위로를 받았다. 


샌드위치 가게는 찍지 못하고 맞은 편을 찍었네

한국에 돌아와서 '영국'하면 그때 먹었던 샌드위치가 떠오른다.

돈은 그때보다 많아졌지만, 시간이 궁핍한 나로서는 우연히 여행객들이 도움을 청해 오면 마치 내가 여행 온 것 같이 느껴져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내가 그때 만났던 점원을 떠올리며 손짓 발짓 여행객들에게 도움을 주고 나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그때 먹었던 샌드위치처럼 나도 그렇게 한국을 오가는 여행객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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