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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수돌 May 19. 2020

예순다섯 아버지의 우수사원 표창장

세상 모든 아버지들을 응원합니다.

듣기만 해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말이 있다.

나에겐 그 말이 ‘엄마’, ‘아빠’, 그리고 ‘가족’이었다. 솔직하게 인정하자면, 어릴 때 나는 사회성이 덜 발달된 사람이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겉을 뱅뱅 돌기 일쑤였고, 소풍날이나 수학여행은 내게 별로 행복한 추억을 선물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발적 따돌림은 아니었을까.

마흔의 나이에도 (거짓말 약간 보태) 대학생 커플 같았던 우리 부모님

지금처럼 사회성이 발달하기 전, 부모님은 내게 친구 그 이상의 존재였다.

마흔에 낳아 흔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었던 나는 부모님과 유대감이 깊었다. 매일 저녁 내내 하루 있었던 일과를 끊임없이 재잘거렸고, 부모님과의 사이엔 비밀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어머니가 섭섭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버지를 너무 닮아 생각만으로도 통한다는 말이 절실히 나올 정도였다.


아버지는 내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직업을 바꾸셨다.

전기 엔지니어로서 중동을 돌아다니면서 일하시다가, 한국에 들어와 안정적인 직업을 얻고자 택시 운전을 시작하셨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개인택시면허를 받으셨고, 20년 넘게 한 우물을 파셨다. 어릴 때 아버지가 개인택시운전사라는 사실이 참 좋았다. 학교에 행사가 있거나, 날이 좋을 때 남들처럼 직장에 묶인 게 아니라서 아버지만 괜찮으면 어디든 가족이 함께 갈 수 있었다.


커가면서 나는 아버지의 나이나 직업이 부끄러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늘 내게 주변 친구들에게 아버지가 개인택시 운전사라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속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아버지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간혹 친구들이 택시 기사와 실랑이했던 일화를 이야기하며 내게 택시기사를 욕하거나, 그들의 행동들이 싫다고 이야기할 때, "그래도 안 그런 분들이 더 많은걸"라는 말 한마디 꺼내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니 아버지가 생각나 마음이 저려와 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친구들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를 비교해본 적은 단연코 없다.

친구들이 가부장적이고 대화하기 힘든 아버지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충을 이야기할 때, 나는 매일 저녁 부모님과 떠들고 웃고 즐겁게 보낸 기억밖에 없으니깐 비교 대상이 아니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은퇴 전까지 택시 운전대를 놓지 않으실 줄 알았다.

그런데 작년 초 아버지의 눈에 갑작스러운 이상이 생겼었다. 수술을 하지 않으면 실명할 수도 있는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안건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수술을 하고 난 후에는 정상생활이 가능하나, 건강을 위해 20년 넘게 해 오신 개인택시기사 생활을 야간에는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아버지는 절망하셨었다. 그나마 내가 회사를 다녀서, 큰돈이 들어갈 곳은 더 이상 없었지만 아버지는 은퇴를 하기엔 너무 젊다고 생각하셨다.


결국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버지는 수술을 받으셨다.

유전적으로 대물림될 수 있는 병이라는 사실에, 수술받기 전까지 아버지는 괜스레 내게 미안해하셨다. 수술을 받고 나서 약 한 달 정도 치료를 거쳐 아버지는 일상생활로 무사히 복귀할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가 다시 시작이었다. 재취업 해야 하는 길, 아버지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이력서를 작성하셨다.


예순넷의 아버지의 재취업을 응원하면서 중장년층이 새로 시작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임을 깨달았다.

은퇴할 나이지만, 아직 경제적 생산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음에도 아버지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특히 IMF 이후 회사에 다녀본 적 없는 아버지에게 평범한 일자리는 얻기 어려운 듯 보였다.


몇 번의 면접 끝에, 집 근처 골프장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셨다.

규모가 큰 기업형 골프장이다 보니 근무환경도 좋았고, 무엇보다 택시기사 생활을 오래 하신 아버지의 경험을 높게 사 나이와 관계없이 아버지를 채용했다는 점이 참 감사했다.


아버지가 개인택시를 접고 앞날을 걱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아버지를 향한 직장동료들의 평가가 좋다고 아버지가 늘 이야기하셔서 그런가 보다 라고만 생각하고 어머니와 합세해 아버지의 자랑이 늘어났다고 놀리기만 했는데. 어제는 갑자기 아버지가 표창장을 받으셨다고 내게 자랑스레 내미셨다.

위 사람은 맡은 바 업무에 정성을 다하여 회사 발전에 기여하고 모든 직원의 귀감이 되었다는 찬사

개인택시 기사로 고생하셨던 아버지의 지난 삶이, 그리고 재취업에 도전한 아버지의 용기 있는 결단력이 우수사원 표창장으로 인정받은 것같아 건네받은 후 방에 돌아왔을 때,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생전 처음 상장을 받고, 소감을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는 아버지.

아버지의 모습을 눈으로 담지 못했지만, 뿌듯한 미소가 얼굴에 서린 아버지의 미소가 상상되어 '참 우리 아버지 행복하셨겠구나' 싶었다.


그동안의 땀과 노력, 고생이 한데 섞여 만들어낸 뜻깊은 결과물.

젊은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고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역시 아버지셨다. 아버지의 우수사원 표창장을 보며, 나는 부끄러워졌다. 아버지도 저렇게 역할을 다해 내시는 데 나는 지금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아비만 한 자식은 없다는데 나는 아버지의 발끝만이라도 따라가는 자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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