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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라이프는 다음 생에

이번 생은 맥시멈라이프

by 남수돌
그래 나는 이제 미니멀라이프의 삶을 살아가겠어!


처음 자취를 선택했을 때만 해도 나는 결심했었다.

작디작은 열 평 남짓한 이 월세방에 필요 없는 짐은 절대 들이지 말자고.


그 결심은 이사 온 지 만 하루 만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집 한편에 자리 잡은 벽걸이 TV 때문이었다.

KakaoTalk_20200814_002841086_01.jpg 우리 집 벽걸이 TV의 모습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벽걸이 TV는 자리만 차지할 뿐이라고 부동산 사장님께 TV를 벽에서 떼면 안 되냐고 사정했었다. 그런데 이사 오고 짐을 풀자마자 TV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혼자 사는 집에 [사람 사는 느낌]을 불어주는 것.

부모님과 같이 살던 공간에서는 알아차리지 못한 TV의 역할. 이토록 찬란하고 멋진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줄이야. 마치 공산품을 멀리하며 자연으로 돌아가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TV를 멀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상은 아니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아 자취를 시작했으면서도 외로움을 즐기는 것은 아직 쉽지 않은 법.

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내 주위에서 느껴지는 공백감을 TV 속 사람들의 목소리로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집]이라는 공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어쩌면 우리 집이 포화상태가 되어도 이 TV만큼은 포기할 수 없게 될 듯하다.


TV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식탁만큼은 사지 말자 생각했던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마저도 이사온지 일주일 만에 나에게 좌식생활은 좋지 못한 것임을 절실히 깨닫고선 어느새 오늘의 집에서 정신없이 식탁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KakaoTalk_20200814_002837371_01.jpg 우리 집 식탁의 모습

생각보다 식탁은 자취 라이프에 있어 중요한 포지션을 담당한다.

필요에 따라 식탁은 작은 작업대도 되었다가 손님들이 오면 훌륭한 집들이 한상이 차려지는 맛의 공간이기도 하다가, 어두컴컴한 저녁 홀로 술 한잔과 안주 한 젓가락을 기울일 수 있는 친구도 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에도 우리 집 세간살이 중 식탁을 고르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 같다.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식탁을 건졌으니 감사히 여겨야 하려나.


마지막으로 내 미니멀라이프를 망친 것, 그것은 놀랍게도 거울이었다.

이쯤 되었을 때 내 친구들이 만약 이 글을 읽는 다면 내게 이런 말을 했을 것 같다.


너 사실 미니멀라이프는 핑계고 사고 싶은 건 다 사들이고 있는 거지?


그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린데, 무슨 말이고 하니.

미니멀라이프로 살고 싶은 건 맞는데 그동안 자취 로망으로 간직했던 자취 템들을 사들이는 건 본능에 의해 치러지는 의식 없는 행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KakaoTalk_20200814_002841086.jpg 우리 집 거울의 모습

즉, 거울은 산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본가에도 내 방에는 거울이 있다. 눈으로 자신의 몸을 체크하는 [눈바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 이케아에서 하나 장만했었다. 그러나 그 거울은 벽에 고정되어 있기에 내가 보고 싶은 각도로 나를 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랬기에 우리 집이 좁아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거울만큼은 꼭 들이고 말겠다며 [오늘의 집]과 각종 포털에 최저가로 살 수 있는 방법을 신나게 서칭 했었다.


그 결과 어느새 우리 집에는 좁은 방과는 어울리지 않은 이동식 원형거울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나의 TV와 식탁과 거울을 사랑한다.

이 모든 것들이 분명 내 미니멀라이프를 일찌감치 포기하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결국 사람 사는 곳=내가 원하는 것으로 채워 넣는 공간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미니멀라이프는 다음 생에 양보하고, 이번 생에는 나를 위해 이 공간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 고민하는 삶을 살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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