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 잇 [비닐봉지] 편에 대하여
노숙자들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었을까?
아니요, 저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난민과 장애인,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가진 적은 있었지만, 매일 아침 출퇴근길에 서울역 역사 안에서 만나던 수많은 노숙인들의 삶에 대해선 관심조차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어떤 연유로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 할 수 있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관심 갖기보다는 비가 오는 날이면 역사 안을 가득 매우던 그들의 쾌쾌하고 지린 냄새에 코끝을 막은 채 서둘러 지나가기 바빴었다.
왜 그들은 인생을 포기했을까
건강한 신체로 일하지 않고 교회나 자선단체에서 나눠주는 음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그들을 보며 왜 저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그들이 가진 사연에 대해 궁금해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들을 혐오하는 눈빛은 그대로 둔 채, 고작 그들을 위해서 하는 일은 가끔 역 앞에서 마주치는 [빅이슈] 판매원분들께 산 잡지 한 권이 다였으니까.
그러던 중 한 다큐를 보게 되었다.
EBS에서 방영 중인 [세상을 잇는 다큐 it '4회 비닐봉지'편]이었다.
EBS 다큐 it 은 하나의 사물을 매개체로 삶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낸 프로그램이다.
'장갑'을 소제로 그것을 끼고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의 삶을 담아내거나, '반지하'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려낸다. 때로는 코로나 시대의 달라진 대중문화를 '캠핑'을 통해 보여주는 등 새로운 시도와 포맷이 돋보이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내가 본 4회 '비닐봉지'편은 여성 홈리스, 즉 여성 노숙인의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2017년 대전의 한 공터에서 여성 노숙인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그녀를 성폭행한 뒤 살인을 저질렀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했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 사건은 그리 큰 이슈가 되지는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관심조차 받지 못했던 노숙인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보게 된 다큐멘터리에서 보게 된 여성 노숙인들의 삶은 충격적이었다.
전국 홈리스 11,340명 중 2,929명(2016년 기준)이 여성 홈리스로, 이마저도 과소 여성 노숙인들은 각종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숨어 지내기 때문에 정확하게 집계된 수치는 아니다.
여성 홈리스들은 어떻게 거리에 나오게 된 것일까.
경제적인 이유로 홈리스가 되는 남성들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여성 홈리스들이 거리를 나서는 가장 큰 이유는 가정폭력이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여성들 모두 남편에 의한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해 자녀들과 이별하고 거리로 내몰린 상태였다.
여성 홈리스들의 가장 큰 문제는 성적&폭력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
전국의 홈리스를 위한 시설은 약 130여 개로 대부분 남성 전용이거나 공용이라고 한다. 여성 홈리스들을 위한 시설은 단 12개지만 그마저도 대부분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그들은 365일 24시간 내내 성폭력과 각종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실제로 거리에서 지내는 여성 노숙인들의 대다수가 경험한 적이 있기에, 특히 야간에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자 24시간 카페, 여성 공중화장실에 숨어서 쪽잠을 지내기 일수이다.
다큐멘터리 속 여성 홈리스들은 비닐봉지를 끊임없이 모았다.
이 비닐봉지 속에 그들은 여성임이 드러나는 생리대, 속옷을 숨기거나 최대한 남성처럼 보이고자 옷을 껴입기도 하고 그 옷을 비닐봉지 속에 보관하기도 한다. 보이지만 그 속을 온전히 알 수 없는 비닐봉지처럼 여성 홈리스들은 이렇게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한다.
특히 여성 청소년일 경우엔 문제가 더 심각하다.
가정 내 불화나, 부모님으로부터 겪는 가정폭력을 견디지 못해 사회로 내몰린 청소년들에게 사회는 무자비하고 가혹하다. 잠자리 조차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매매를 통해 지낼 곳을 찾게 되고 생활비를 벌어들인다. 누가 이들을 쉽게 돈을 번다고 비난하고 그들의 도덕성을 문제 삼을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말미에는 여성 홈리스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 제도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 홈리스들은 거리에 살아가면서 이미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가 되어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조차 어렵다. 일부 여성 홈리스들은 도움조차 거부한 채 스스로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간다.
이 밖에도 여러 여성 홈리스 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며 과거 서울역 근처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야근 후 회식까지 겹쳐 밤 12시쯤 집에 들어가던 그 시절의 나는 길거리에 술 먹고 행패 부리는 사람들, 노숙인들, 지나가면서 힐끔 쳐다보는 남자들 모든 사람들이 무서웠다. 더 빨리 집에 도착하기 위해 택시를 탔던 내 뒤로 얼마나 많은 여성 홈리스들이 공포에 휩싸인 채 밤을 지새워야 했을까.
비단 홈리스의 문제는 여성 홈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번 삶을 놓아버리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그들의 신체가 아무리 건강하다 할지라도 길 위에서 지낸 시간이 오래될수록 그들의 정신은 빠르게 파괴되어간다는 것을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들에게 내가 당장 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그리 확연히 변화시키지는 못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홈리스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에 혐오가 아닌 동정과 관심이 담겨있다면 이보다 더 성공적이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프로그램이 또 있을까?
우연히 보게 된 여성 홈리스의 삶.
이 글을 읽고, 한 분이라도 다큐멘터리를 찾아보신다면,
그래서 나 또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될 수 있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