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오후부터 증상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무시하고 먹고 싶은 만큼 밥을 먹고 디저트까지 먹었더니 탈이 왔다. 잠들면서 불안 불안했는데 역시나. 나의 두통은 위장과 소통이 잘 된다. 위장에서 음식을 소화하는 능력이 좋지 않은데 과식을 하고 신경을 좀 쓴 날이면 어김없이 두통이 같이 온다. 40대가 넘어서면서 소화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 그럼 위장이 감당할 만큼의 양을 먹어야 하는데 식탐을 줄이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소화를 시키지 못하면 배에 가스가 차서 빵빵해진다. 순식간에 만삭의 몸이 된다. 배가 나오는 것보다 배에 가스가 찼는 것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때마다 두통이 동반된다는 사실이다. 약국에서 쉽게 구하는 소화제와 두통약을 먹다가 어느 날부터 이 약들로 해결이 되지 않아 병원에서 처방받아 약을 먹고 있다. 두통 없는 뇌로 돌아오기까지의 시간들은 참 힘들다.
골치 아프다고 말하는 일들이 일어나면 두통이 발생한다. 단순한 사고(思考)를 하는 사람보다 생각 많은 사람들이 두통이 많은 것 같다.
'생각이 많다는 건 발생하지 않는 일들까지 생각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당연히 그만큼 문제들도 많이 만들어내니 머리 아픈 일들이 많아지는 게 아닐까?' 지금 어떤 상황이 발생했다면 이 하나의 상황에 집중하여 문제 해결을 잘하면 된다. 그런데 생각 많은 사람은(나만 그럴 수도) 이 순간에 일어난 일에 과거와 미래의 것들까지 여러 상황을 만들어 플랜 A, 플랜 B, 플랜 C를 생각한다. 내가 A를 선택했을 때 주변 a, b, c, d와 관련된 각각의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과 상황, 마음을 생각한다. 너무 많은 생각들이 뻗어나가다 문제가 원점이 된다. 오지랖이다. '내 코가 석자'인데 누굴 걱정하나 싶다.
자신의 일이 아닌데 남의 일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거나 나설 때 '오지랖도 넓다.'는 말을 비꼬듯이 쓴다.
오지랖의 사전적 의미는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뜻한다. 적당한 크기의 옷은 편하지만 크기가 맞지 않은 옷은 불편하다.
인터넷에 '오지랖'을 검색하니 여러 관련 문장이 뜬다.
오지랖의 뜻에서부터 오지라퍼의 특징, 원인, 인간의 본성, 심리, 해결책 등 꽤 많은 자료들이 있다.
그만큼 우리 주변에 오지라퍼가 많다는 뜻일까?
<나무 위키>에 올라온 자료를 보니 오지랖이 넓을 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
<부정의 경우>
- 오지랖이 넓다.
- 훈장질, 선생질, 지적질을 한다.
- 참견한다.
- 낄 데 안 낄 데 못 가린다.
<긍정적 경우>
- 이타적이고 다른 사람을 돕기 좋아한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보살피기 좋아한다. - 의리가 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다. - 리더십이 있고 주도적이다. - 상대에게 필요한 이야기, 상대가 잘 되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를 해 준다.
오지랖 넓은 사람들은 이 두 가지 경우의 말을 다 들어봤을 거다. 나 역시 들어 본 말이다.
'가르치려 한다. 오지랖이 넓다. 리더십이 있고 주도적이다. 상대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해 준다.......'
오지랖 넓은 사람의 심리는 뭘까?
(김병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말한 내용을 신문기사에서 참고했다.)
' 자신의 자질은 과대평가하고 타인은 나의 도움이 있어야만 성장할 수 있는 존재라는 착각이 깔려있는 것'이란다..............
이 문장을 보는 순간 충격을 좀 받았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도와주려 한 건데? 손해를 감수한 것들도 많은데 이런 내가 '과대평가'? '착각'?
내가 모르는 나, 혹은 나만 모르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그다음 기사를 읽어 내려간다. 어쩌나. 1차 충격에 빠진 나에게 2차 뼈 때리는 문장이 있다.
오지랖 넓은 사람의 심리 상태에는 '통제의 욕구'와 '자기애'가 있단다.
'통제의 욕구'는 스스로는 애정이나 관심이라고 믿지만, 무의식적으로 타인에 대한 지배 욕구나 통제 욕구에 휘둘리는 것을 말한다.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통제 욕구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무의식 속 통제 욕구를 실현할 권한도 강하고 그 욕구를 정당화할 명분도 많다는 것이다.
내가 크게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그럴 위치도 아닌데 나는 누구에게 이렇게 넓은 오지랖은 펼쳤던가?
아이들이 생각났다. 어른이라고 엄마라는 이름으로, 책임감이라는 명분으로, 스스로 옳은 길이라고 믿는 것들을 강요하지 않았나? 조언하는 방법에서 문제가 되진 않았을까? 조언을 원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넘치는 조언을 하지 않았던가? 가까운 사람이니 더 애정을 가지고 말했지만 오히려 관계가 불편하게 되진 않았나?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문화적 , 세대적 차이도 있다. 또 사람에게는 '청개구리 심보'라는 고유한 본성이 있어 자신의 개인적 자유가 침해된다고 느끼면, 그게 아무리 좋은 조언이나 충고라 하더라도 그 반대로 행동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오지랖 넓은 사람에게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일단 상대방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내가 조언, 혹은 의견을 말해도 되겠느냐"라고 허락을 구하면, 상대는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또 다른 방법은 상대방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이다. 하나의 답을 강요하기보다 여러 가지 대안이 있는데 그중에 네가 고민해서 하나를 선택하면 좋겠다고'하는 것이다.
스스로 결정하게 되면 자기 통제감을 갖게 하고 '스스로 결정했으니 더 잘해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됨으로 인간관계에 효율적이라고 한다.
<kbs news/2017.02.27/[프로덕션 2] 박성희 기사 참고>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는 일'이 미덕일 때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고맙게 여길 때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 일처럼 생각해주는 남들이 불편하게 생각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남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했다. 아주 가까운 사이거나, 가족에게 넓은 오지랖을 부렸다. 답답함에 두통을 얻기도 했다.
지금에서야 '가족이니 더 조심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 의견, 생각을 강요한 게 아닌가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오지랖을 벗자. 나의 추측만으로 행동부터 하지 말고 상대가 도움을 원할 때 언제든 달려가자. 그때는 아낌없이.
가장 가까운 '나'에게 먼저 넓은 오지랖을 벗겨내야겠다. 부족한 것들 속에 '완벽'이라는 굴레를 씌운 적이 많았다. 많은 생각도 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