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난데의 아이들
긴 연휴 중에 생각없이 바쁘고, 그러면서 허망하게 휴일이 지나가버린 후 남는 것들을 떠올렸다.
의외로 소소한 에피소드들보다도 그 와중에 그나마 읽은 이 책이 남았다.
오랜만에 조금 장르 성격이 강한 작품을 접한 흥미를 끝나가는 휴일의 끝자락에서 한번 적어보려고 한다.
이 작품은 이지북에서 개최하는 제 1회 YA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수상작품이다.
나름 문학적인 부분에 깊이를 요구하는 문학과지성사에서 개최한 장르 부문의 수상작이어서 그런지
작품 자체에 깊이가 있고 그와 동시에 문학적인 품격도 갖춘 간만에 보는 수작이었다.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조금 먼 미래. 화성으로 이주한 인류는 그곳에서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찾았고,
그와 반대로 남겨진 지구의 삶은 피폐해진다.
그런 불균형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바로 가상현실게임 미르난데.
그곳에서 우승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자는 화성으로 갈 자격을 얻게 된다.
우리의 주인공 한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힘겹게 사는 소녀. 그래서 그녀는 화성보다는 당장 할머니의
치매에 도움이 되는 약을 얻기 위해 게임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어리버리하면서 실수도 하지만, 동료를 만나고 숨겨진 능력을 찾으면서
한나는 점차 그 가상현실 공간의 영웅이자, 동시에 지구의 영웅으로 성장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의문스러운 게임의 실체를 캐는 조직들과 숨기려는 조직들, 그리고 거기에 숨겨진
비밀들이 하나씩 등장하며 게임이 아닌 현실까지 위협하게 된다.
과연 한나는 다가오는 음모와 게임 속에서 진실의 문을 열수 있을까?
그리고 한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세상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간단히 소개한 내용도 그렇고, 출판사의 소개에서도 그렇지만 이 작품은 해외에서 히트쳤던
메이즈런너나 헝거게임과 같은 고립된 공간에서 살길을 찾고, 그 과정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의
주시 속에서 승리를 쟁취하는 하이틴 어드벤처물에 가깝다.
사실 장르적으로 보면 이건 그냥 재밌다. 어지간히 못쓰지 않는한 대충 설정된 아이들 몇명과
적당히 기발한 미션 몇가지만으로도 책을 몇편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소재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런 보편적인 장르의 재미에 휘말려서 그들중에 하나라고 부를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보면서 느낀, 이 작품만이 가지는 다른 작품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매력이 여러가지가 있고, 그 중에서 나는 특히 두가지 부문에 제대로 꽂혔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고전과의 연결이다. 작중에서도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어슐러 르귄 작가님의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의 오마쥬가 다수 언급되는 작품이다.
당장 주인공 한나의 정체성이 스패로우호크, 새매라는 점에서 말 다했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기성 명작의 명성을 빌리거나 그저 진부한 느낌일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과거에 사람들을 매혹시킨 걸작을 디딤돌로 사용하여 더 깊고 모티브가 된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더 넣고 광대한 이야기를 펼쳐보이고 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렵지만, 새매가 비상하며 늑대를 추격하는 장면에서
전율을 느끼지 않은 독자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머리속을 스쳐가는 분노와 잃어버린 동료에 대한 기억,
그리고 스치는 바람과 서늘한 장애물을 넘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다가가는 묘사를 보자면
어스시에서 제대로 충족되지 못했던 액션을 여기서 비로소 보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같은 작품을 영화화 해서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망작을 만들어버린
지브리 스튜디오의 사례를 보면, 기성 작품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도 얼마나 어렵고, 그걸 뛰어넘는 것은
정말로 끔찍하게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놀랍게도 그 정중하고 품격있는 고전의 문체와 오마쥬된 캐릭터들을
가상현실게임 속의 틴에이저들로 다시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나는 왜 벽이 높은 문학과 지성의 공모전이
이 작품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두번째는 스피디함이다. 이 작품을 본 독자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작품이 전개되는 속도가 정말로 1시간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시간에 모든 내용을 함축해서 담고 있고.
판엠의 역사부터 여러 페이지를 소요했던 헝거게임을 생각해봐도 이런 시원시원한
전개는 다른 작품과 차별되는 작가님의 필력과 정확하게 글의 목표를 향해 가는 프레임이 미리 준비되지
않으면 구현하기 힘든 차별되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비슷하게 장르적인 글을 쓰면서, 어느새 공모전 분량을 훌쩍 뛰어넘어버리고
그래서 줄일 엄두가 안나서 포기한 작품이 부지기수였던 내 입장에서 보면,
이런 정확하게 필요한 글만 담고 군더더기를 제외한 작품이야 말로 장르 작품에 정수란 생각이 든다.
물론 약간의 아쉬움도 있기는 하다. 모든 내용을 담지 못하고 한권에는 전반부에 해당되는
미르난데의 게임 이야기에 집중하고, 다음 권에서 아마도 화성에서 이어지는 진실 탐사로 넘어가는 내용이
이어질 것을 생각해보면 역시나 작가님도 공모전 분량 제한에 고심이 많으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페이지 안에 한나가 각성하고 동료들을 만나고 목적을 수립하는 과정을
칼날로 절삭하듯이 예리하게 담아낸 이 작품은 여백을 없앤 액기스의 결정체라는 생각이 든다.
웹소에서 이런 장르가 때로는 단행본 30권 분량이 튀어나오늘 걸 생각해보면,
작품이란 늘이기 보다는 줄이고 그걸 간결하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미학이라는 것을 동의하게 된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는 부담없이 새매의 각성과 복수를 쉼없이 달려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두가지 특출난 포인트 덕분에 하도 많이 봐서 다소 식상하다는 생각마저 든
이쪽 장르에서 간만에 느낀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개인적인 푸념일지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 입장에서 보면 동화 작가를 지망하기는 하지만
이런 장르 역시도 많은 미련이 있는 입장에서 이 정도의 필력과 세상을 상상하는 역량을
새롭게 시작하는 2025년 새해에는 가지고 싶다는 신년 소망을 가지게 하는 작품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다음권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속편 미르난데의 전사들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도
기대를 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출간일이 블로그 감상을 쓰는 오늘이네.
한나와 동료들이 화성에서 마주할 새로운 모험과 진실의 실체를 이제 곧 서점에서 만날
속편에서 조우하기를 기대하면서 구정 기준, 신년 처음으로 쓴 작품의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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