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창고에서 세계로 간 그녀

2015.02.05

by 종이소리

​"에? 여... 여름이요? 전시회라뇨! 북을 잡은 지 이제 겨우 이틀인데, 전시회에 걸 작품은 무리예요. 제가 무엇을 걸 수 있겠어요?"


​"중요한 건 '무엇을' 걸까 가 아니야. 무엇이든 '걸 수 있다'는 사실이지. 비어 있는 고리만 달랑 있는 것 같은 이곳에, 별도 걸고 달도 거는 것, 전시회란 그런 거란다. 걸려 있는 존재에게 빛을 불어넣어 주는 일 말이야. 이건 재능보다는 끈기가 이루어내는 것이지. 나는 '작품'이라는 거창한 말보다 '꺼리'라는 말이 참 좋구나. 볼거리, 놀잇거리, 추억거리, 이야깃거리... 무언가 전할 '꺼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이니?"


​난색을 표하는 그녀에게 나는 무슨 믿음으로 그리 당당했는지, 그저 웃으며 답해 주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그녀 스스로 해낼 천재적인 감각을 보았기 때문이다.


​국내 최고의 예술대학을 졸업한 그녀가 내 블로그 글을 보고 작업실로 찾아왔던 날. 왜 직조를 배우고 싶냐는 물음에 그녀는 "원리가 알고 싶어서요. 직물이 짜이는 원리요"라고 답했다. 차분하면서도 기품 있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총명하고 호기심이 반짝이는 눈빛도 매력적이었고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지 않는 세심함도 예뻤다.


차를 내어 놓으며 나는 작업실이 초라한 데다 너무 정신없이 어수선해서 민망하다고 했다.


"제 방은 더 엉망이에요.

여기저기 원단이 재봉틀 앞으로 펼쳐져 있어서 엄마한테 맨날 혼나요^^ 여기는 보물창고고요"


나는 그 대답만 듣고 한 달 작업실 사용료 십만 원만 내고 마음껏 놀아보라 했다. 재료비는 필요할 때 직접 구해오는 것으로 정하며, 우리만의 '작업실 놀이'가 시작되었다.


​언제든 올 수 있도록 작업실 키를 건네자 그녀는 깜짝 놀라 물었다.


"저를 어떻게 믿고 키를 주시나요?"

"그러니까요. 이제부터 증명해 봐요. 당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첫 제자와 함께한 나날은 내게도 퍽 유익하고 보람찼다. 그녀는 모든 것이 신기하다며 내 작업물들을 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님, 여기는 진짜 보물창고가 맞아요! 신기한 게 너무 많아요. 이게 다 선생님 작품이잖아요? 선생님의 역사네요!"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확신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그녀의 감각에 포착된 아이디어들이 그녀를 세계 무대로 데려갈 것이라고.


​그러던 어느 날, 한지의 원료인 삼지닥줄기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얼마 후, 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 공모전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여 독일 종이 박람회에 출품하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전에 선생님께서 보여주셨던 재료에서 아이디어가 떠 올라 출품했는데,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어요. 혹시 낙방할지도 몰라서 말씀 미리 안 드렸어요. 죄송해요 선생님."


​나는 진심 어린 축하와 함께, 이제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며 전화를 끊었다. 세계로 나아가는 이는 그 넓은 곳에서 자유로이 재능을 펼쳐야 하는 법. 일일이 보고하듯 연락할 스승이 존재한다는 것이 때로는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비전공자이기에 더 이상 그녀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솔직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결정을 떠올리면 참 잘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제자가 잘 되면 그뿐이다. 바람에 날려간 꽃씨가 제 땅을 찾아 꽃을 피우는 것이 자연의 섭리가 아니던가.


​늘 그녀의 성공을 빌며, 비록 그녀가 인정하지 않더라도 내게는 참 고마운 시간이었다. 비전공자인 나를 깍듯이 스승으로 대우해 주던 그녀가 종종 궁금하고 그립다.

그녀도 열쇠를 덜렁 맡길 수 있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보람된 나날을 보내면 좋겠다. 그리고 누군가 비전공, 비전문가의 자격으로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면 이렇게 위로하면 고맙겠다.


자격은 증명서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능성을 먼저 발견하고 기꺼이 믿어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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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공이면 어때, 자격보다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