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06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2013년, 그녀가 생을 마감하던 해에 소더비와 뉴욕 경매를 통해 전 세계의 갤러리와 박물관들이 앞다투어 그녀의 숨결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 소식을 접하며, 언젠가 꼭 한 번은 그녀를 마주하리라던 나의 오랜 목표 하나가 비참하게 찢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만나고 싶었던 건, 결코 허락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당당하게 인정받고 싶었을 뿐.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지만, 나 역시 손톱이 깨지고 찢기는 통증 속에서 나만의 기법과 조형을 치열하게 연구해 왔노라고. 그러니 나는 당신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의 길을 걸어온 '창작자'임을 그녀의 눈을 보며 확인받고 싶었다.
한 분야의 집요한 연구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표절'이나 '모방'이라는 단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때 비로소 그 값이 '참'이 된다.
그래서 창작은 늘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시작된다고 몇 안 되는 나의 제자들에게 잔소리가 아닌 부탁으로 당부한다. 스스로에게 얼마나 까다로운 채찍질을 가해야 하는지, 자신의 양심 앞에 얼마나 꼿꼿해야 하는 일일인지.
때문에 요즘은 갈수록 이 주눅 드는 마음과 전쟁 중이다. 정보가 귀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손가락 하나로 전 세계의 디자인을 훑어볼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기 전에 혹시나 닮은 꼴은 없는지 살피는 것이 숙명이 되고 있다.
그런데 참 기분이 묘하다. 둥근 지구 어딘가에서, 나와 같은 생각으로 비슷한 창작 활동에 매진하는 '미친 끼'를 가진 이들이 서로의 작업에 취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 짜릿하고, 때로는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제 루스와 함께 작업하는 것은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되었다. 아쉽지만, 그것은 기꺼이 승복해야 할 기쁨이기도 하다.
오히려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녀가 철사로 세상을 엮었듯, 나는 나의 종이로 내일의 가치를 엮어가리라. 이것을 또 하나의 꿈으로 뻗어 나가는 새로운 가지로 여기며./2019.02.06의 일기
내가 마주하고 싶었던 거장, 루스 아사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활동한 조형 설치 예술가입니다. 그녀의 삶과 예술 철학을 들여다보면, 소재는 다르지만 '엮고 짜는 행위'를 통해 본질에 닿으려 했던 창작자의 고독한 투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멕시코 바구니 짜기에서 얻은 영감 (1947): 루스 아사와는 1947년 멕시코 여행 중 현지인들이 아연 도금된 철사로 바구니를 짜는 방식에 매료되었습니다. 이는 그녀가 평생을 바친 '철사 조형 기법'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출처: Ruth Asawa 공식 재단)
공간에 그리는 드로잉 (Drawing in Space): 그녀는 철사를 엮어 내부와 외부가 투명하게 공존하는 입체를 만들었고, 그 결과물뿐만 아니라 벽에 비치는 '그림자'까지도 작품의 일부로 보았습니다.
"공중에 선을 그릴 수 있을까?"라는 그녀의 질문은 형태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 정신을 보여줍니다. (출처: SFMOMA 아카이브)
예술 교육의 민주화: 그녀는 "예술은 읽기나 쓰기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이라 믿으며 샌프란시스코 공립 예술 고등학교 설립을 주도했습니다. 예술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닌, 삶의 방식임을 몸소 증명했습니다. (출처: 샌프란시스코 예술 위원회 기록)
그리고 2026년 2월 6일.
사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루스 아사와는 예술을 정식으로 전공한 엘리트 예술가였고, 나는 그와 같은 학문적 배경이나 화려한 학위를 갖추지 못했다는 차이. 그러나 누군가 나에게 작품의 구상과 자격증의 유무를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나에게는 오로지 ‘만들고 싶은 열정’과 ‘어떤 작품이 탄생할까?' 라는 설렘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전부라는 것.
놀랍게도, 그 결핍의 자리를 채운 진솔한 의지와 멈추지 않는 실험정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자신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과 학위라는 잣대 대신,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숨김없이 도전했고, 부정적인 시선보다는 희망적인 미래를 향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그 무수한 시도들이 쌓여 지금의 내 경력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니, 아직은 간이역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진행 중인 연구와 실험 과제가 남은 생까지 계속 가지를 뻗을 테니까.
그러니 세상이 정해놓은 ‘전공’이라는 틀에 주눅 들거나 어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회가 그어 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면, 그 선과 타인의 시선을 오히려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기지를 발휘하며 자신의 시간으로 만드는 지혜를 키우자.
예술은 전공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그 과정을 즐기는 모두의 것이니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고 묵묵히 나아가는 이 걸음이, 뒤따라오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길을 밝히는 지혜의 빛이 되어 줄 테니까.
비전공자라는 꼬리표 대신 '감각있는 창작자'라는 자부심으로, 오늘도 자신의 시간에 진솔하고 순수한 열정을 태우자.
나보다 먼저 이런 각오와 다짐으로 도전 중인 그대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