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키워줄 게

은밀한 물음표 VS 지혜의 쉼표

by 종이소리
이류네 이류. 비전공이라면 주류는 아니니까. 잘 생각해 봐요. 기회가 쉽게 오는 건 아니잖아요? 내 작품과 콜라보하면 누가 더 이익일까? 그리고 단순하게 그 걸로만 끝나나? 다음엔 날개를 다는 거지.


"그러니까 교수님 말씀은, 교수님의 작품 프레임을, 제 손으로 짠 지승(紙繩) 작품으로 해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게 하면, 훌륭하신 교수님의 명성에 힘입어, 제 이름도 값이 오른다는 의미시죠?"


테이블 위로 두 팔을 올리며 그와의 거리를 좁힌 나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꽤, 흥미로운데요? 비주류인 제가 주류의 대열에 설 무대가 되겠군요?"


그는 오른손 검지로, 미끄러진 안경을 콧대로 밀어 올리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비전공이 혼자 대작가가 되기란 쉽지 않지. 전공자들도 미술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데. 일생에 있을까 말까 할 기회 아니겠어요? 그런데, 뭐더라? 노끈이라고 했나? 그걸, 손으로 직접 꼬은다고 했어요? 시간은 얼마나 걸릴까?


몸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데, 눈은 비틀어 뜨고 말하는 재주를 타고났는지, 그의 눈빛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눈썹을 활처럼 늘리며, 아이스커피잔에 꽂힌 스트로를 휘저었다. 차그락차그락, 얼음과 얼음을 부딪히며, 기분을 환기시켰다.


"작업시간은 교수님 작품 크기에 따라 달라지겠죠. 그런데.. 그전에.."


100호 정도면?

"100호요? 아, 죄송해요. 제가 '호'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센티미터로 알려주시겠어요?"


아, 참. 그렇겠네. 캔버스로 작업을 안 하니. 응. 이해했어요. 100호 크기가 얼마냐면, 가로 162센티 세로 130 센티 정도. 뭐 , 별로 크지도 않아. 그래서 얼마나 걸린다고?

갑자기 그의 오른쪽 팔꿈치가 테이블 위에 오르더니, 턱을 괴며 눈을 반짝였다.


"162센티에 130센티미터라면... 음... 일 년은 걸리겠는데요?"


1 년? 1년이나 걸린다고?


나는 테이블에서 양손을 내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깍지를 끼고서 손가락 관절을 꺾었다. ' 두두둑 ~ 뚝 뚝'


"이해가 안되시죠? 자, 잠시 상상해 볼까요? 먼저, 한지를 구입해야 해요. 저는 꼭, 국내산 한지, '순지'로 사는데, 크기가 가로 143센티, 세로 75센티미터예요. 가격은 '순지' 한 장당, 만원 정도 해요. 국내산 순지의 경우, 수입보다 가격이 두 배 정도 차이가 나지만, 제가 꼭, 국내산 '순지'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는 제 작업 노하우라서, 생략할게요. "


그래서, 내 작품 프레임에 쓰려면, 몇 장이나 필요하다는 거요? 간단명료하게.


다급해 보인다는 느낌은 나만의 착각일까?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자르며 캐묻는, 그의 표정이 꽤 상기되어 보였다.


"백 장입니다"

백 장? 만 원짜리 백 장? 그럼 얼마냐.. 가만있자, 계산기. 만 원 곱하기 백 하면, 백만 원?

"예. 그리고 옻칠도 해야 하니 백만 원만 드는 게 아니죠. 옻칠비용은.."


꿀꺽. 하는 소리와 함께 스트로를 찾아 커피를 마시는 그의 눈이, 휴대폰 액정으로 옮겨 갔다.


"옻칠 비용만 이백 만원 정도 들겠는데요? 그리고 일 년 정도 걸리는 작업 비용을 감안하면, 아, 제 작업비용은, 제 강의료 기준으로 해서 시간당 ○○만 원이예요. 그렇게 계산을 해 보.... "

어째서 일 년씩이나 걸리지? 뭐 끈으로 엮기만 하는 거 아닌가?
한지를 꼬은 지승끈.2020

"먼저, 143 곱하기 75센티미터 순지를, 가로 1.5센티미터, 세로○○센티미터로 자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백 장을 모두 같은 크기로 잘라야 해요. 그다음에 한지를 꼬아 노끈을 만들어야 하죠. 그리고 노끈으로 캔버스 프레임으로 짜..."

그 작업이 일 년이 걸린다는 거군. 응. 이해했어요.

"그게 끝이 아닌데요? 옻칠 작업이 남았거든요."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시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전혀 계산에 없었던 작업 비용을 운운한 것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그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스트로로 커피잔 속 얼음을 톡톡 치고는, 잔뜩 찡그린 미간으로 눈을 꿈뻑꿈뻑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옻칠은 얼마나 걸립니까?
일주일?
한 달?


"그 작업이 일 년이 걸리겠어요. "


그는 눈을 치켜뜨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된다는 듯.

풉, 뭐라고요? 옻칠이 일 년?

"옻칠은 습도와의 전쟁이거든요. 옻칠을 실패하면 다시 짜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요. 그래서, "


못하겠다? 자신이 없어서?


이제 좀 지쳤다는 듯 늘어진 목소리였던 그가 갑자기 승기를 잡은 듯한 표정으로 오른쪽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필요한 구실을 찾았다는 의기양양함이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는, 공손하게 말씀드렸다.


"고명하신 교수님의 작품을 훼손이라도 하면, 비주류인 제가, 교수님 작품을 보상해 드려야 할 테니, 사전에 그 부분에 대한 상호계약서를 쓰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을,

이렇게 길게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


" '비주류'인 저를 생각하시고, 클 기회를 주신다니, 그 마음, 너무 감사하고 영광이에요, 교수님. 그래서 오래오래 교수님께 가르침도 받으며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 서로 신뢰를 기반으로, 제 변호사님 입회하에, 상호계약서를 작성하고 공증을 받은 후에,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됩니다."

뭘, 그렇게까지...

라고 말하고는 그는 단숨에 커피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전화 좀 하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예, 교수님. 바쁘신 분이 저 때문에.. 제가 시간을 너무 뺏었죠? 죄송해요."

아니, 뭐.. 서로 좋은 얘기 했지 뭐..

마뜩잖으면서도 마지막 예의는 지키고 싶었는지, 그는 어설프나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저, 그런데, 실례인 줄 알지만, 궁금해서요. 교수님, 혹시 몇 학 번이세요? 너무 어려 보이 셔서요. 하하"


나? ○○학번이지. 왜요, 혹시... 저보다 위... 신.. 가.., 위.. 세요?

"아하하하하.. 그러네요! 제가 네 살이나 많은 학 번인 걸요? 어쩌면, 관리를 너무 잘하셨네요. 너무 멋지세요. 저, 꼭 좀, 키워 주세요. 교수님!"



내가 키워줄게

얼마나 불균형한 권력이자,

얼마나 기만적인 시혜(施惠)인가.


노동 착취, 작가성 훼손,

상하위계 강화가 본심인

일부, "일류"와 "주류"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아낌없이 베풀고,

성장을 응원해 주는 고마운 분들이

다시금 눈물겹도록 소중하게 느껴지며,

나는 그분들 앞에서 더 낮아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장인의 노동을 값싸게 여기는 태도에

수없이 많은 쉼표로 달래면서도,


묵묵히 지켜보며 따스하게 이끌어주는

훌륭한 선배님들이

더 많이 계시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를 느꼈던 날이었다.


"내가 키워줄게."


"난 이미 다 커서,

더 크면 외계인이 될걸요?"


매주 금요일 연재 브런치북

《비전공이면 어때? 자격보다 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