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것을 구하는 손

리클레이메이션의 풍경

by 종이소리



버려진 것을 구하는 손


리클레이메이션의 풍경


내가 업사이클링에 대한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2014년, 작업실을 창신동으로 옮기면서부터였다.


그 무렵 나는 ‘업사이클링’이라는 말보다 먼저,
리사이클링 캠페인 기사들을 자주 접했다.
환경을 생각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고마웠지만,
솔직히 마음이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당시의 내 인상은 이랬다.
리사이클링은 그래봐야
쓰레기를 잠시 보관하는 일처럼 느껴졌고,
그 이후 등장한 업사이클링은
쓰레기를 예쁘게 포장해 잠시 보관하는 방식처럼 보였다.


‘잠시 보관’에서
‘예쁘게 포장해서 잠시 보관’으로
업그레이드된 셈이었다.


지구 환경을 고민하며 실천하는 움직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그 말들이
나를 행동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이후 내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만지고, 겪게 된 것들 때문이다.


창신동에서 마주한 풍경


서울 종로구 창신동은
한국 패션 산업의 중심지라 불리는 곳이다.
수많은 의류가 이곳 봉제 공방에서 만들어진다.


작업실을 그곳으로 옮기고 나서
나는 매일 퇴근길에 같은 장면을 보게 됐다.
흥인지문 근처, 종량제 봉투들이 쌓여 있는 풍경이었다.


다가가 보니
멀쩡한 원단들이 한데 묶여
쓰레기봉투 안에 담겨 있었다.
재단 후 남았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진 자투리 원단들이었다.


그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왜?
왜 이 멀쩡한 원단을 버리지?”


그날 이후, 나는 업사이클링 디자인을 준비하며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찾아보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업사이클링의 ‘출발점’을 검색하게 됐다.


오래된 기사 한 편에서 만난 태도


그때 알게 된 이름이
독일의 디자이너 **라이너 필츠(Rainer Pilz)**였다.


2014년 당시,
나는 1994년 10월에 발행된
SALVO Monthly에 실린 그의 기사를 읽었다.
영문 기사였고,
그 내용을 완벽히 이해할 만큼의 영어 실력은 없었다.


전체 맥락을 온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몇몇 문장은 오래 남았다.


최근 다시 이 기사를 정확히 번역하며
나는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비로소 제대로 읽게 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필츠는
때로는 건축에서 나온 오래된 부품을,
때로는 지역에서 직접 수거한 폐자재를 사용해 작업했다.
그 자재들은 대부분 그가 직접 찾아낸 것들이었다.


그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버려진 것들로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고 적혀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환경을 위해서’라는 설명보다
그의 태도가 먼저 보였다.


“먼저 디자인하지 않는다”


기사에서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은 이것이다.



그는 먼저 디자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재료를 찾지 않는다.
그는 있는 것으로 설계한다.



필츠는 설계를 시작하기 전
반드시 현장을 직접 실측하고,
보유하고 있는 제한된 자재를
어떻게 사용할지 최대 6주 동안 계산한다고 한다.


이 기사를 통해 나는 깨달았다.
버려진 자재를 쓰는 일은
즉흥적이거나 낭만적인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확한 계산과 책임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다정하지만 느슨하지 않은 방식


기사에 따르면,
필츠의 작업장은 모든 공정이 초 단위로 계산된다.


자재를 분해하고,
못을 빼고,
세척하고,
다시 자르고,
조립하고,
포장해 출고하는 시간까지
모두 숫자로 환산된다.


복잡한 절단이 필요한 벤치는
예전에는 이틀이 걸리던 작업이었지만,
절단 각도를 컴퓨터로 계산하면서
18분으로 줄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화를 내는 유일한 순간은
품질이 기준에 못 미칠 때라고.


이 대목에서 나는 안심했다.
버려진 것을 다룬다고 해서
기준까지 낮아질 필요는 없다는 걸
이 기사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리클레이메이션’이라는 말을 꺼낸다


이 기사를 읽고 난 뒤,
나는 업사이클링이라는 말 대신
**리클레이메이션(Reclamation)**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이 말은 직역하면 ‘되찾다’에 가깝다.
버려진 것을 다시 사용한다는 의미보다,
버려졌다고 판단된 것의 자격을 되돌려 놓는 느낌에 가깝다.


리클레이메이션을 한국어로 풀어 말하자면


리클레이메이션은
재활용처럼 공정을 설명하는 말도 아니고,
업사이클링처럼 결과를 강조하는 말도 아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하고 싶다.


이미 끝났다고 여겨진 것에 대해
“아직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태도.
다시 쓰기 전에,
먼저 다시 바라보는 일.


조금 더 순화해서 말하면,
리클레이메이션은
‘되살림’,
곧 재생의 감각에 가깝다.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그대로 두는 것도 아닌,
지금 가진 모습 그대로
한 번 더 살아볼 기회를 주는 일이다.


업사이클링을 반대하는 이유


그래서 나는 종종
“업사이클링을 반대합니다”라는 말을 꺼낸다.


정확히 말하면,
업사이클링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쁘게 만들었으니 괜찮다’는 말이
모든 질문을 덮어버리는 순간을 경계하고 싶다.


왜 이건 남았을까.
왜 이건 버려졌을까.
정말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까.


그 질문까지 가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 쉽게
다음 결과물로 넘어가고 만다.


리클레이메이션은
그 질문을 생략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내 작업은 거창하지 않다


종이노끈을 엮고,
실패한 작업을 다시 바라보고,
자투리를 패턴으로 바꾸는 일.


그건 세상을 구하는 일이 아니다.
다만 조금 덜 버리는 방식으로 살아보는 연습이다.


나는 오늘도
버려진 것을 구제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들어 올려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말해본다.


“이건 아직 재료야.”
“조금만 더 같이 가보자.”


남기고 싶은 말


리클레이메이션은
전문가의 언어가 아니라
생활자의 감각에서 시작되는 말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무엇을 버리기 전에
한 번 더 손에 올려보는 것.
그 작은 망설임이
세상을 아주 조금 다르게 만든다.


참고


SALVO Monthly, No.23, October 1994
“Salvo in Germany” – Rainer Pilz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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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보_필쯔.PNG SALVO Magazine Reiner Pilz

기사 전체 스캔 이미지


1994년 10월, SALVO Monthly에 실린 기사.
라이너 필츠는 ‘버려진 자재로 설계한다’는 태도를 이미 이 시기에 실천하고 있었다.


이미지 (상단 좌) / 절단 벤치(18분 사례) 사진


복잡한 절단이 필요해 이틀이 걸리던 작업이,
계산을 바꾸자 18분으로 줄어들었다.
버려진 자재를 쓰는 일은 낭만이 아니라 정밀한 계산이었다.


이미지 (상단 아래) 프랑크푸르트 공항 터미널 설계 사진


프랑크푸르트 공항 터미널 내부 설계 사례.
필츠는 ‘있는 자재’를 기준으로 공간을 다시 구성했다.
먼저 디자인하지 않고, 가진 것으로 설계한다는 방식.


이미지 (중간 부분) 재생 도어 랙 시스템 사진


재생된 문을 몇 초 안에 찾아낼 수 있는 도어 랙 시스템.
대량 보관이 아니라, 정확한 분류와 관리가 핵심이었다.


이미지 (하단 좌) 작업장 바니시·마감 사진


작업장에서 직접 혼합한 셸락 바니시.
폴리우레탄 마감은 사용하지 않는다.
재료를 다루는 태도는 마감에서 드러난다.


이미지 (하단 우) 발루스터(난간 기둥) 비교 사진


같은 형태, 다른 출처.
새로 만든 복제품과, 다시 살려낸 오래된 재료.
차이는 크지 않지만, 선택의 방향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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