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리 플래닛

2024.12.31

by 종이소리

A형 독감이라는 것이 몸에 침투하더니

열이 39.5도까지 오르락내리락했다.

이렇게 아픈 감기는 처음이다.


눈을 떠보니 링거에 꽂힌 손이 보였고, 그 전후의 기억은 가뭇하다.


작업실을 옮기느라 며칠 분주하긴 했지만

무리라고 부를 만한 일은 없었다. 늘 해오던 일상이었는데, 아무래도 나이라는 단어를

이제는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나 보다.


집에 돌아와 오랜만에 아주 느긋하게 영화를 틀었다. 넷플릭스에 막 올라온 〈론리 플래닛〉.


이야기도 좋았지만 모나코의 한 리조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테리어와 조경,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내용은 다시 보기로 미뤘다.


그 와중에 단 하나의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열이 펄펄 나는 와중에 연필을 찾아 적어 내려간 문장.


“당신과 있을 때,
가장 나답게 편안했어요.”


예의를 갖추느라 긴장해야 하는 자리,

좋아 보이기 위해 자꾸만 나를 꾸며야 하는 관계들. 그와 달리 나는 자연스러운 내가 좋다.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묻고 배우는 나도, 잘나기보다 인간적인 쪽을 택하는 나도, 실수 앞에서 변명하지 않고 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는 나도,


그리고 지나친 간섭 앞에서는 “그건 내가 아닌걸요?”라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는 나도 참 좋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친절한 햇살 아래 잘 여문 열매처럼 튼튼하고 끈끈한 관계를 잇는 요령의 사전을 조금씩 써 내려가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 장면 하나가 마음에 들어 사진을 남겼다. 그물처럼 성긴 구조를 좋아하는 내 눈에 뿅뿅 뚫린 창문은 중국에서 온 연적 시리즈의 무늬와 닮았고, 수납공간의 유리 부분을 가린 크라프트 종이 완충재의 패턴과도 닮아 있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나의 취향과 작업 세계가 한 장면 속에서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털고 일어나 종이 완충재 업사이클링 작업도 정리해야겠다.


할 일이 태산이라는 이유로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시간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오늘은 쉼이라는 이름의 하루를 조용히 받아 적는다.

2024년 마지막 날에.